일명 우필(祐弼). 호는 춘산(春山). 평안북도 의주 출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百五人事件)에 연루되어 윤치호(尹致昊) · 양기탁(梁起鐸) · 유동열(柳東說) · 이승훈(李昇薰) · 차리석(車利錫) 등과 같이 잡혀 전라남도 진도에 1년 동안 유배되었다.
1919년 3 · 1운동 때 향리인 의주일대에서 태극기와 선전문을 제작, 배포하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수배를 받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1920년 8월 미국회의원단이 한국을 시찰할 때, 대미외교를 전개하기 위해 안창호를 준비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정인과(鄭仁果) · 여운형(呂運亨) · 여운홍(呂運弘) · 손두환(孫斗煥) 등과 함께 1,400원의 예산으로 이들을 접대,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 · 손정도(孫貞道) · 양기하(梁基瑕) 등과 같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이사 · 경리부장 ·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교민단단장 겸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으로 인권옹호와 독립운동가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며, 조선혼을 불러일으켰고 보습과와 도서관도 신축할 것을 천명, 의욕적인 민중계도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뒤 교민단의 회계검사원, 임시정부국무원(내무총장 등)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 · 1절기념식을 거행할 때에는 사회자로 무궁화를 선창하여 군중을 감동시켰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기관지 『상해한문(上海韓聞)』 사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 뒤 한국노병회 이사장을 거쳐 1926년 임시정부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