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출신. 충청남도 공주에서 살다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주진수(朱鎭守) · 우이견(禹利見) 등이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고, 1917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우이견 · 안종운(安鍾雲) · 소진형(蘇鎭亨) · 권영만(權寧萬) 등과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결의하고, 불응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여 각지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에 자금을 거두어 소진형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집금원(集金員)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심영택(沈永澤) · 안종운 · 장응규(張應奎)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주비단(籌備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같은해 12월 강경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1921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