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수(士受), 호는 삼주(三洲) 또는 보객정(報客亭). 이일상(李一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조(李成朝)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 이우신(李雨臣)이며, 어머니는 승지 윤빈(尹彬)의 딸이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익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32년(영조 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대교를 거쳐 1734년(영조 10) 봉교가 되었다. 1736년(영조 12) 병조좌랑·정언·경기도사를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時務十一條)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하였다.
1737년(영조 13) 부수찬·교리가 되고 이조좌랑·교서관교리에 전임되었으며, 1738년(영조 14) 이조정랑·응교·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를 거쳐 1740년(영조 16)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府城)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1742년(영조 18) 승지·부제학·대사성, 이듬해 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48년(영조 24)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비변사제조에 선임되었으며, 1750년(영조 26)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1752년(영조 28) 동지경연사·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고, 1754년(영조 30)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영조 31)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고, 1756년(영조 32)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영조 37) 이조판서로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63년(영조 39) 예조판서·대제학·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해 바른 말을 잘해 여러 번 파직되었다. 글은 주의(奏議)에 능했으며 생각하는 일은 반복해 상소하고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나 시조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