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헌납(獻納) 이거(李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이달존(李達尊)이고,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탕(李宕)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정암(李廷암)의 아우이다. 정윤희(丁允禧)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년(선조 3) 형조좌랑·전적,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형조정랑, 1574년 사간원정언·경성판관, 이듬 해 사간원헌납·예조정랑을 거쳐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해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廣州牧使)·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모아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했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승문원부제조·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럽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물러나 대사성·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 한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睟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용사기사(龍蛇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