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동산(東山). 일명 종순(鍾淳)·병천(柄天). 경상남도 통영 출신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만주로 망명,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남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 재만동포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8월 남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조직된 독립운동 통합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여, 산업위원과 실업위원장으로 뽑혔다. 1923년 12월 직제개편 시 군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부터 1924년까지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7월 10일 길림(吉林)에서 정의부(正義府) 조직을 위한 주비발기회를 개최할 때, 김동삼(金東三)과 대한통의부 대표로 참여, 정의부를 조직하는 데 공헌하였다.
정의부가 조직된 뒤 중앙행정위원으로서 선전위원장직을 맡아 재만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928년 5월 12일부터 15일간 길림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에서 정의부 외 18개 단체 대표 39명이 모여 민족유일당촉성(民族唯一黨促成) 문제를 협의할 때, 정의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김동삼·현정경(玄正卿) 외 20명을 일반위원으로 선임하고 의견 조정을 꾀하였으나, 개인 본위에 의해 기성단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派)와, 기성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자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全民族唯一黨協議會派)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때 이종건은 지청천(池靑天)·김원식(金元植)·김상덕(金尙德) 등과 함께 촉성회파를 지지, 1928년 8월에 개최된 정의부 제5회정기중앙의회에서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1929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창당되자 참여했으며, 1931년 8월 현익철(玄益哲)이 일본 경찰에 붙잡힌 뒤 조직을 재정비할 때 보안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신빈현(新濱縣) 하북(河北) 지방에서 조선혁명당 간부회의를 개최하던 중 일본군인의 습격을 받아 조선혁명당 주요 간부인 이호원(李浩源)·김관웅(金寬雄)·이규성(李奎星)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32년 11월 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6년 2월 1일에 개최된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에서 유동열(柳東說)·김원봉(金元鳳)·이규채(李圭彩)·김희남(金熙南)·김산(金山)·최윤동(崔允東) 등과 국방위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4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입헌기념식에도 참석하였다. 1947년 6월 24일 서재필(徐載弼) 귀국환영회 준비위원으로도 일하였다.
같은 해 좌우합작을 주창하던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부위원장으로 일했는데, 이 때 이종건과 함께 활동한 인물로는 이극로(李克魯)·조봉암(曺奉岩) 등을 들 수 있다. 1947년 4월 11일 민주주의독립전선 동료들과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하지(Hodge, J.R) 중장과 회담을 열기도 하였다.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경상남도 통영면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