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평숙(平叔), 호는 뇌진자(懶眞子)·서파(西坡).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며, 상산수(商山守) 이계보(李繼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억손(李憶孫)이고, 아버지는 이유정(李惟貞)이며, 어머니는 김기서(金麒瑞)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주서·정언을 거쳐 1581년 헌납이 되고 이어 진주목사·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도승지로서 죄인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조달책임을 맡았으나 병으로 은퇴하였다. 그뒤 한성부좌윤·춘천부사를 거쳐 예조·병조의 참판을 지내고, 1600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 홍여순(洪汝諄)의 일파로 몰려 한 때 파직되었다.
그러나 1600년 안동부사·경주부윤으로 복귀하였고, 광해군 때 좌참찬·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15년(광해군 7)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이어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의 일파가 계축옥사를 일으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등 정사를 어지럽히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