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응 ()

이한응 사진
이한응 사진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 순국지사.
이칭
경천(敬天)
국은(菊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4년(고종 11)
사망 연도
1905년(고종 42)
본관
전의(全義)
출생지
경기도 용인
정의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 순국지사.
개설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상훈과 추모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순국열사이한응선생유사』(손세창, 문예홍보사, 1957)
『한국통사(韓國痛史)』(박은식, 대동편역국, 1915)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第二課編, 東文社書店,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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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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