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禮山) 출신. 아호(雅號) 또는 필명(筆名)으로 고산(孤山)과 금오산인(金烏山人)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는 예산의 옛 지명이고 후자는 이해문이 다녔던 예산보통학교의 뒤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다.
이해문은 예산보통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4학년 때 중퇴했다고 한다. 이해문이 학업을 중단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라고 하지만, 그 확실한 것은 확인되어 있지 않다. 이후 독학으로 한학(漢學)과 중등 과정을 통신강의록으로 학습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 예산군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기도 했다.
이해문이 어떤 경로를 밟고 문학수업을 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193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본명 이외에 고산 또는 금오산인 등의 이름으로 지상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7년 6월에 창간된 시동인지 『시인춘추(詩人春秋)』와 1938년 6월 창간된 『맥』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시인춘추』는 이가종(李家鍾)·황백영(黃白影)·박노춘(朴魯春)·이해문 등 예산 및 그 인접의 지역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이해문은 예산군 관내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0년 6·25동란 때, 인민군에 의해 부르주와 반동으로 몰려 총살되었다고 한다. 이해문의 묘소는 고향인 대술면(大述面) 소재의 선영에 있다.
시집으로는 1939년 1월 시인춘추사에서 간행한 『바다의 묘망(渺茫)』 한 권이 있을 뿐이다. 이외에도 사망하기 전까지 시와 수필 및 평론 등이 각 지상에 다수 발표되어 있으나,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인생이 예술을 낳는다.”는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하였듯이, 이는 바로 이해문의 시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流露), 곧 감상과 낭만성이 이해문의 시적 특색으로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