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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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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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3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전 자유당 소속 민의원 및 참의원과 핵심 당간부 등이 구 자유당의 이념 계승을 표방하고 1963년 9월 7일 결성한 보수야당이다.

1963년 1월부터 정치활동이 허용되자 「정치활동정화법」에서 풀려난 구 자유당인사 400여 명이 1963년 3월 3일 ‘47인진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소정당의 단합과 지도자의 결속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백종덕(白鍾德) 계열의 자유당 재건, 김법린(金法麟) 계열의 민정당 참여, 이활(李活) 등의 민주공화당 참여, 그리고 이범석(李範奭)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족청년단체 등으로 갈라져 행동통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3·3동지회(구 자유당 47인 진로대책위원회)에서 민우당(民友黨, 가칭)에 불참한 조경규(趙瓊奎) 등이 주동이 되어 그 해 9월 7일 시민회관에서 자유당 창당대회를 열어 수석최고위원에 장택상(張澤相), 최고위원에 조경규·김철안(金喆安)·남송학(南松鶴) 등을 선출함으로써 자유당을 재건하였다.

그 뒤 1966년 12월 16일 제4차 전당대의원대회에서 당헌을 개정하여 종래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면서 당대표자의 직명도 당의장으로 바꾸고, 이재학(李在鶴)을 당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장택상은 제5대 대통령선거에 임하여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야당이 단일후보를 내야 한다는 이유로 출마를 포기하였다.

그 해 11월의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지역구 41명, 전국구 4명의 후보자를 공천하고 선거공약으로 진정한 민정복귀완성, 공무원의 정치적 완전중립 확보 및 실리적인 농어민근로자 복지실천 등을 내세웠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방법으로 의원직을 사퇴한 일부 지역구 보궐선거에서는 5개 지역구에 후보자를 공천하였으나 전원 낙선하였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도 지역구 72명, 전국구 14명을 공천하였으나 역시 모두 낙선하였다.

창당 이후 한번도 원내 진출을 하지 못하고 1970년 1월 24일 신민당사에서 양당 통합을 위한 합동회의를 열어 합당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신민당에 흡수,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당사』1(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73)
집필자
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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