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잡가라는 말은 『동가선(東歌選)』·『남훈태평가』 등의 가집에 나타나는 곡명에서 유래된 것이나 문학적으로 볼 때는 시조·가사 등과 구별되는 일군의 시가류를 지칭한다.
이러한 잡가의 개념에 대한 견해는 국문학자간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조윤제(趙潤濟)는 처음에는 가사의 하위 장르에 잡가를 두었으며, 그 특성으로 가사가 속화(俗化)하여 읽고 읊는 시가에서 노래부르는 창곡적 시가로 변할 때는 그 형식이나 내용의 변화가 일어나며, 이러한 것을 잡가라 하였다.
그러나 뒤에 잡가는 시가의 유형적 명칭이 되지 못하고 「유산가」·「이팔청춘가」 등은 곡조에 의존하여 존재할 뿐이라 하였다. 이병기(李秉岐)는 처음에는 곡에 의하여 사설시조를 잡가라고 하였으나 뒤에 잡가는 민요·속요·타령 등을 통칭하는 명칭이라 하여 민요를 잡가라 지칭하고 있다.
그 밖에 김사엽(金思燁)은 잡가는 항간에서 잡되게 부르는 소리로 광대라는 직업적 가수에 의하여 창작되고 성행한 것이 일반에게 불려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견해들은 잡가를 어떤 곡에 의하여 부른 노랫말을 가리키면서 그 창자나 곡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장르의 분류기준은 창자나 곡 등 문학외적 조건에 의하여 정해질 수 없으며 작품의 특성에 의하여 분류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문학과 음악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부사(漁父辭)」나 「양양가(襄陽歌)」는 국악에서는 12가사에 넣고 있으나 문학적으로 볼 때 이들은 한시이고, 더구나 「양양가」는 이백(李白)의 시로 중국문학에 속한다.
그리고 시조의 경우도 국문학에서 시조라 할 때 평시조에서 사설시조에 이르는 모든 시조시를 다 포괄하나 국악계에서는 가곡이나 노랫가락의 곡조와 구별되는 시조계의 곡을 가리킨다.
이렇게 같은 용어이면서 문학계와 음악계에서는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잡가의 개념도 국악계의 규정과 국문학의 규정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현전하는 잡가집을 보면 국문학의 장르체계 안에서는 서로가 변별되는 여러 갈래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곧, 시조를 비롯하여 가사·한시·창가 등과 이들 장르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시가들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 이들 잡가집을 만든 사람은 잡가라는 말을 이들 여러 장르를 포괄한 것으로 사용한 것 같으나, 내용 목차를 보면 가사·시조·입창·좌창 등을 구분한 경우도 있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들 잡가집에서 기존의 국문학 장르에 속할 수 있는 시조·가사 등을 빼고 남은 시가를 잡가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곡이 가사이든 잡가이든 관계없이 그 형식적 특성에 따라 문학적 입장에서 잡가를 추출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추출된 잡가의 특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직업적 가수에 의하여 창작, 전승된 시가이다. 그것은 가집의 표지나 작품에 구체적으로 누구의 노래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② 그 형식이 다양하다. 가사와 비슷한 것이 있는가 하면 분절되는 것 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③ 노래된 내용 역시 다양하다. 사랑과 인생의 무상 등 놀이터에서 흔히 불릴 수 있는 여러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④ 소박한 민요적 표현이 있는가 하면 한시문이 삽입된 것도 있다. 다양한 내용이 노래되었기 때문에 활용된 어휘나 표현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⑤ 일반인이 따라 부른 노래들이다. 잡가집의 출판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객관적 증거라 할 수 있다.
⑥ 구전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에 같은 노래라도 전승자에 따라 그 차이가 많다. 이렇게 볼 때 잡가는 노래판에서 가객에 의하여 창작, 전수되고 일반인들의 애호를 받아 번창한 노래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잡가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대학본 『청구영언』에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상사곡(相思曲)」·「권주가」·「군악」·「어부가」·「양양가」·「매화가」 등 16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몇 편이 빠지고 새로운 시가가 추가되어 이른바 12가사가 이루어졌다.
12가사에는 「어부가」와 같이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가 있는가 하면, 「권주가」 등 그 성립연대가 최근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다. 따라서 오랜 시대에 걸쳐 불리던 노래들이 19세기초 내지 중엽에 판소리의 열두마당과 같이 짝을 맞추어 12가사로 형성되었으리라 보인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유산가」·「적벽가」 등을 묶어 12잡가라 한 것은 그것보다 더 뒤에 이루어진 것 같다. 잡가를 형성한 계층은 삼패나 사계축의 소리꾼이다. 이 방면의 명창으로는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이 유명하다.
12잡가의 첫머리에 오르는 「유산가」가 박춘경이 지은 노래였다고 하니 비록 잡가 중 일부의 시가는 그전부터 있었다 하겠으나 12잡가로 묶여진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일제 침략으로 반상의 차별이 무너지고 창가나 유행가가 대두되기 전인 1930년대까지가 잡가가 번창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잡가의 형식적 특색은 여러 형태의 문학적 갈래가 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한 제목 아래 내용상 통일이 이루어진 「유산가」와 같이 준가사체와 유사한 것,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바위타령」과 같은 타령, 그리고 「방물가」처럼 대화체로 구성된 것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준가사체의 형식을 취하는 잡가를 가사의 변격으로 돌리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비슷한 장르를 원장르에 귀속시키기로 하면 잡가의 일부는 사설시조로, 또 일부는 민요나 판소리의 허두가로 돌려져 그 존재가 분해되고 만다.
분해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시가의 특성을 살펴 논의를 바르게 하는 것이 문학사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면 서로간에 변별되는 장르는 한데 묶어 이해하고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음은 분절되는 것으로 여기에도 내용상 유기적 관련을 가지는 「권주가」와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매화가」와 같이 전혀 내용상 관련이 없는 연(聯)들이 모여 한편의 시가를 형성한 것이 있다. 끝으로 분절되면서 후렴을 가지는 것이 있다.
여기에도 여음이 각 연의 앞에 오는 것, 뒤에 오는 것, 뒤에 오면서도 여음이 교체되는 것 등 다양하다. 이렇게 형태가 다양한 것은 향유자가 즐기기만 하면 가객은 어느 장르에서나 가사를 취하여 잡가로 만들기 때문이다.
노래된 내용은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여기에는 임이 생기라고 비는 것에서 비롯하여 이별의 안타까움, 배우자 모르게 누리는 탈선된 사랑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것이 있는가 하면 주변의 소박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또한,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여 유한한 삶의 안타까움과 아울러 젊어서 놀자는 향락적인 내용도 있다.
그 밖에 판소리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잡가도 있다. 「소춘향가」·「집장가」·「형장가」·「사랑가」 등은 「춘향가」의 내용을 따서 노래한 것이며, 「적벽가」·「공명가」·「화용도」 등은 판소리 「적벽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 「박타령」은 「흥부가」에, 「토끼화상」은 「수궁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
노래판에서 관중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잡가의 소재가 되고 있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으로 살펴볼 때 잡가의 구성은 여러 갈래의 장르가 혼용되어 이루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곧, 시조·가사·판소리·민요 등이 모두 잡가형성에 원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장르는 잡가로 수용되면서 새롭게 변용되었다. 시조인 경우는 사설시조가 많이 원용되었으나 종장형태의 구성이 미흡하며, 가사인 경우는 4음보격의 율조를 깨뜨리고 있다.
판소리에서는 부분만이 노래되었고 민요인 경우는 세련미가 가미되고 소박미가 줄어들었다. 만약 이러한 변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잡가가 아니고 원래의 장르에 소속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잡가의 향유층은 신흥도시 상공인에서 비롯하여 일반서민 및 사대부 계층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삼패나 사계축을 불러 노래를 시킬 수 있는 계층이 처음에는 신흥도시 상공인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점잖은 양반층에서는 가곡이나 가사와 달리 잡가는 즐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서민들의 애호를 받게 되고 여기에 자극되어 일부 양반 계층까지 잡가가 감상, 수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은 잡가는 조선 말기에 형성되고 번창하다가 1930년 전후 유행가 등 서양풍의 노래에 밀려난 노래 문학이다. 따라서, 잡가는 조선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학장르라는 데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또,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시문학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최종 장르이기 때문에 종래부터 있었던 시조·가사·판소리 등의 원용이 가능하였으나 새로운 사조에 밀려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잡가도 『가요집성(歌謠集成)』 등의 단행본으로 자료정리작업과 연구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