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응진 ()

인물
일제강점기 때, 휘문고등보통학교 교무주임,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 등을 역임한 교육자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백악(白岳), 백악자(白岳子), 백악춘사(白岳春史), 하루모토 요우신[張元膺震]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고종 17) 3월 5일
사망 연도
1950년 8월 30일
본관
인동(仁同)
출생지
황해도 은율
관련 사건
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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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휘문고등보통학교 교무주임,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 등을 역임한 교육자 · 관료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인동(仁同). 필명으로 백악(白岳)·백악자(白岳子)· 백악춘사(白岳春史)를 사용하였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루모토 요우신[張元膺震]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0년 3월 5일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다가 1897년 서울로 올라와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 도쿄[東京] 준텐[順天]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1905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수리과에 청강생으로 들어가서 1909년 3월까지 윤리·수학·물리·수공(手工) 과정을 마쳤다.

도쿄고등사범학교를 다니면서 1906년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 회장과 태극학회 기관지인 『태극학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평양 대성학교 교원으로 1912년까지 재직하였다. 대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1909년 8월 윤치호, 이승훈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징역 7년 판결을 받고 1년간 복역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 학감 겸 교무주임으로 이직하였다. 1920년 5월 조선교육회 설립준비위원과 1922년 11월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6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내분규사건 때 학생들이 퇴진을 요구하자 8월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하였다. 퇴직 후 보성전문학교 강사 겸 촉탁으로 지내다가 1925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유로 취직하였다. 1927년 5월 휘문고등보통학교 21년 기념식에서 표창장을 받았다. 1928년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11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학관으로 임명되어 1938년까지 맡아 재직하면서 조선인 사립학교를 담당하였고, 학무국 편집과 편수관을 겸직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교과서 편찬과 검정업무를 담당하였다. 1932년부터 1938년까지 교육효적자선장위원회(敎育效績者選裝委員會) 위원·소학교 및 보통학교교원시험위원회 위원·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 조선어장려시험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3년부터 전문학교입학자시험 검정위원회 위원도 맡았으며 1936년 6월 『조선』에 「조선부인문제에 대한 소견」이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1937년 1월 14일 학무국 사회교육과가 사회교화진흥책으로 기획한 라디오를 통한 사회교화방송에 강사로 출연하였고, 12월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38년 9월 조선인 최초로 공립고등여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광주욱(光州旭)고등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해서 1942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한 이래 ‘황국신민’으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고 지원병·징병제를 선전, 선동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대표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마지하야 총후부인에게 드리는 말씀」(『가정의 벗』, 1939.9), 「과식의 폐단을 바꾸자」(『경성일보』, 1939.9.30), 「가정과 학교: 학교에서 가정으로 희망-관심과 이해」(『녹기』, 1939.12), 「남존여비사상에서 해탈 여자교육에도 주중(注重)하라」(『매일신보』, 1940.1.12). 「구주대전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바로 과학의 승리」(『경성일보』, 1940.7.4), 「부르심을 밧자올 날을 앞두고」(『반도의 빛』, 1942.11) 등이 있다. 1942년 일본 정부로부터 정5위에 서위되었다.

해방 후 휘문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 11월에 「학제개혁의 관견(管見): 이글을 특히 문교당국자와 학교당국자에게 드림」(『동아일보』, 1948.11.19~20)에 기고하여 대한민국 교육행정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휘문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30일 부산 피난지 임시학교에서 과로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14(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 3(민족문제연구소, 2009)
『휘문칠십년사』(휘문중고등학교, 1976)
『동아일보』(1929.11.2; 1948.11.19~20)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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