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의 『개원례(開元禮)』에 의하면, 재실은 삼대(三代) 이전에는 없었으나 진(秦)나라 때에 무덤 옆에 재실을 짓고 묘제(墓祭)를 드렸던 것을 본받은 한(漢)대에 풍습이 되었다. 당나라 때에는 한식날에 조상의 묘를 돌보는 의식을 하였는데, 신도(神道)를 숭상하여 영역(塋域)에 함부로 접근하지 않고자 남쪽 산문(山門) 밖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재실을 마련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송(宋)대에 묘제를 지내는 묘정(墓亭)으로 계승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에서는 종묘와 왕릉에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무덤 근처에 재실을 짓고 묘제를 지내는 관습이 사대부가의 예에서도 더욱 확장되어 보편화되었다.
재실은 이렇듯 묘제와 연관이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선대 봉사를 위한 의례용 공간이었으나,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도 교육과 선현 제향을 했기 때문에 재실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강당형, 민가형, 요사 활용형, 복합형 건축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一자형, 二자형, ㄱ자형, □자형, 튼□자형 등의 배치 형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대체로 묘소 아래에 짓기 때문에 재실 근처에는 선산이나 위토(位土)가 있고, 재실에는 묘지기[墓直] 또는 산지기[山直]가 살면서 묘역을 관리했다.
재실은 선대 봉사를 위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사당 혹은 묘우(廟宇)와 비슷하지만, 조상의 체백(體魄)을 모시는 분묘(墳墓)를 수호하고 묘제(墓祭)를 준비하는 재사(齋舍)라는 점에서 조상의 신혼(神魂)이 깃드는 신주(神主)를 모시고 직접 제사를 지내는 묘우와 차이가 난다. 또한 1480년에 건립된 안동(安東) 진성이씨가(眞城李氏家)의 재사가 잘 보여주듯이, 유교화가 심화되는 17~18세기까지는 대체로 산직 외에도 불교 승려가 거주하며 재실의 관리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철저히 유교적으로 관리하는 묘우와는 다르다.
재실은 묘제를 중심으로 하는 의례와 더불어 문중의 재산 관리나 시설 유지 보수 등 문중의 각종 대소사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리는 공간으로서 조선시대 가문과 문중을 유지하는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유교 문화가 약화된 현대에 와서는 그 기능과 의미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