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무수(茂壽). 본관은 진주(晉州). 출신지는 경상남도 하동.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곤양 출신. 증 호조참판 정철석(鄭哲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판서 정의걸(鄭義傑)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 정호(鄭浩)이다.
1580년(선조 13)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해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방어의 계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金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했고, 곤양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 유병별장(游兵別將)이 지내고, 상주목사 김해(金澥)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왜대장(討倭大將)으로서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성주 · 합천 · 초계 ·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해 경주 · 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직을 대행해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해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오르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방어사로 나가 다시 침입해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처했고, 다음 해 김해부사 · 밀양부사 · 중도방어사(中道防禦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상주충의사(忠毅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