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동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보(仁甫)
조계(棗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49년(명종 4)
본관
광주(光州)
주요 관직
예조참판|경상도관찰사|동지춘추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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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동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인보(仁甫), 호는 조계(棗溪). 정지하(鄭之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우(鄭繼禹)이고, 아버지는 정윤적(鄭允績)이며, 어머니는 신자강(申子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20년 경연기사관(經筵記事官)으로 사관의 올바른 임무수행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서·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가 되었는데, 이 때 6품에서 5품으로의 승진이 너무 빨랐다 하여 사헌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527년 지평·문학을 역임한 뒤 헌납이 되어 정병(正兵)의 입역(立役) 과다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2년 후 능성현령으로 나가 직무를 태만히 한다 하여 치죄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집의 등 언관을 거치면서 행신(幸臣)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향촌교육의 내실화를 건의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폈다.

1536년부터 사간·응교·집의·전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판을 거쳤다. 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선치하였고, 곧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평안도의 양전(量田)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가 부총관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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