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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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참의,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건(子健)
한벽재(寒碧齋)
이칭
용국(鏞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4년(세종 26)
사망 연도
1500년(연산군 6)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이조참판
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참의, 대사간,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건(子健), 호는 한벽재(寒碧齋). 정윤성(鄭允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鄭攸)이고, 아버지는 정유공(鄭由恭)이며, 어머니는 육씨(陸氏)이다. 정붕(鄭鵬)의 작은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안현감 ·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483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다음 해 사헌부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원사(元史)를 강(講)하는 대신, 경서(經書)를 강할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곧 이조정랑으로 옮겨 보덕 허침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산정(刪定)하였다.

1489년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유자광(柳子光)이 장악원제조로 임용되자, 장악원제조는 덕망이 있는 자라야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했다가 성균관사예로 전직되었으며,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밀양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유(師儒)로 천거되었으며, 의정부사인의 직에 있으면서 사유에 뽑혔다.

잠시 김해부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해 제포(薺浦)에서 왜인과 본국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문제가 크게 되자 경상도경차관이 되어 제포에 파견되었는데, 그 때 본국인의 심문을 잘못하여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의 참지 · 참의를 역임했고, 2년 뒤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판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간행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김종직 · 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성리학을 강론했고, 성종 21년 사유(師儒)로 선발된 13인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청빈하여 전도(前導)가 없이 다니니 ‘산자관원(山字官員)’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산 경락사(景洛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잡록(海東雜錄)』
『대동기문(大東奇聞)』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집필자
이병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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