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부(敬夫). 정태보(鄭台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희(鄭熙)이고, 아버지는 감찰 정제(鄭提)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관찰사 김약채(金若采)의 딸이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재행(才行)이 있었다.
처음에는 환관(宦官)들을 교육하였고, 뒤에는 세종의 명으로 영응대군 염(永膺大君琰)을 가르쳤다. 승의부위사정(丞義副尉司正)·경창부승(慶昌府丞) 등을 거쳐 1449년(세종 31) 수부사직으로 경창부승을 겸하였다. 1450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부교리가 되어 수양대군을 따라 집현전에 나아가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찬하였고, 그 뒤 훈련원주부·서학교수(西學敎授)·성균관사예 등을 거쳤다.
1453년(단종 1) 행사용(行司勇)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6품직에서 4품직으로 승진되었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사성이 되고, 1457년 집현전직제학으로 승진,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1457년(세조 3) 집현전 직제학으로 승진하며 하원군(河原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세조의 명으로 주상자(主喪者)가 되었다.
이후 1469년(예종 1) 7월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하원군(河原君) 봉조하(奉朝賀)에 올랐으며, 같은 해 9월에 지병으로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청렴 검소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