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안동 풍산(安東 豊山) 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원익(趙元益),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로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이경익(李景翼)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뛰어나서 「기삼백도수(朞三百度數)」·「대연수(大衍數)」·「하락수(河洛數)」를 모두 통달했다. 스승에게 배우는 외에 당시 학자로 명성이 높던 권상일(權相一)과 이산두(李山斗)에게 서면 또는 면질(面質)하여 기중(器重: 재기를 중하게 여김)함을 인정받았다.
1747년(영조 23)에 진사시를 거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禮曺佐郞)에 옮겼으나 정후겸(鄭厚謙)이 예조참판(禮曺參判)이 되어 부임할 때 나가서 마중하지 않음을 트집잡아 종을 시켜 매를 치게하니 이에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어버이를 효성으로 모시면서 자제 교육에 전념하였다.
1781년(정조 5) 정조가 지난 일을 듣고 가상하게 생각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하였으나 입직한지 6일만에 사표를 내고 돌아왔다. 그 뒤 1788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오위장(五衛將)에 승직되었으나 연만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팔우헌문집(八友軒文集)』 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