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석기시대(Mesolithic)는 1865년 존 러복(John Lubbock)이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눈 이후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이를 가리키면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하지만 지역과 시각에 따라 사용하는 맥락과 내용에서 차이가 있어 유럽에서 널리 쓰이고,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는 중석기시대 개념이 부적당하여 쓰이지 않는다.
서아시아에서 후구석기시대(Epipaleolithic, 또는 종말기 구석기시대)라는 용어도 중석기시대와 비슷한 맥락에서 쓰이는데, 이 경우 약 2만 년 전부터 8000년 전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 기온이 상승하면서 수렵채집민은 계절에 따라 동식물 자원을 체계적으로 이용했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세석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1만 5천 년 전 이후 나투피안(Natufian) 문화에 이르러 몇몇 수렵채집민은 풍부한 환경 자원을 바탕으로 한곳에 정주하면서 가젤을 사냥하고 야생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그렇게 호밀을 재배하면서 토기 없는[선토기] 신석기시대에 들어선다. 이처럼 서아시아에서 후구석기시대, 또는 종말기 구석기시대는 최후 빙하 극성기 이후 기온 상승과 환경 변화의 시기 수렵채집 생활과 문화의 변화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유럽 중석기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약 1만 1,700년 전 플라이스토세가 끝나면서 서아시아로부터 농경의 물결이 들어오기 전까지 몇천 년 동안 수렵채집 생활을 지속한 것이다.
최후 빙하 극성기(Last Glacial Maximum)에 극에 이르렀던 냉한기는 이미 1만 5,000년 즈음부터 큰 기온 상승기를 맞았다. 남유럽에서는 매우 작은 세석기와 찌르개가 특징인 아질리안(Azilian)이라는 석기문화가 알려져 있다. 이렇게 중석기시대에는 세석기를 이용한 복합 도구가 가장 성행하였다. 그러면서 지역에 따라 8,500년 전에서 5,500년 전 즈음 신석기시대 주민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중석기 문화는 끝을 맺는다.
말하자면, 중석기시대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갑작스럽게 변화한 환경에 새로이 적응한 수렵채집민의 문화이다. 영국의 중석기시대는 플라이스토세 이후부터 서기전 4300년 즈음까지를 포괄한다.
이 시기 유적으로 유명한 요크셔의 스타카(Star Carr)에서는 수렵민이 해마다 이곳을 찾으며 붉은사슴을 사냥하고, 물오리를 잡던 흔적이 나왔다. 플린트로 아주 작은 돌날을 만들고, 그것을 잔손질해 화살촉 같은 사냥 도구를 만들어 살았다. 그렇게 세석기를 화살대에 꽂아 쓰기도 하고, 송곳을 만들어 나무나 가죽을 뚫는 데 쓰기도 하였다.
우거진 숲에서 사냥했을 뿐 아니라 열매를 따고 뿌리도 캐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수 주변 갈대밭을 태운 뒤 이곳을 떠나 이듬해 다시 돌아왔다.
중석기 수렵채집민은 큰 강가와 해안 가까이 살면서 풍부한 주변 환경을 이용하였다. 생산성이 높은 곳이라면 경우에 따라서 정주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다뉴브강의 레펜스키비르(Lepenski Vir) 유적 같은 것이 그 사례다.
사슴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각종 견과류와 산딸기 같은 열매를 따서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미 농경마을이 자리 잡은 시리아나 터키 같은 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유럽 남쪽으로 확산해 들어오면서 중석기 문화는 위기를 맞았다.
서기전 7500년 즈음이면 그리스 같은 곳에 신석기시대 농경마을이 등장하며, 서기전 6000~5000년이면 유럽의 여러 지역까지 확산한다. 새로이 들어온 주민은 진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고 씨를 뿌리고 가꾸는 농경마을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신석기 농경 문화는 서서히 전 유럽으로 확산하면서 기존 중석기시대 수렵채집 사회는 해체를 맞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세석기 유물을 중석기시대의 표지라고 주장한 연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방사성탄소연대 등 절대연대측정을 바탕으로 세석기 기술이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일반화했음이 드러나면서 중석기시대 개념은 더는 쓰이지 않는다.
세석기 기술은 최후 빙하 극성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현재 한반도 곳곳에 등장했으며, 후기 구석기시대 내내 존속하였다. 다만 이 시기 수렵채집민은 매우 이동성이 높았던 것 같다. 매우 먼 곳까지 이동하면서 자원과 돌감, 그리고 유용한 정보를 획득했으며, 폭넓은 혼인망도 지녔을 것이다.
구석기시대 최말기, 그러니까 최후 빙하 극성기가 끝나면서 한반도에 수렵채집민의 점유 밀도는 크게 떨어졌다. 최후 빙하 극성기 이후 기온 상승의 시기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에는 토기의 등장이라는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일본열도에서는 플라이스토세 최말기 토기 유적이 그리 드물지 않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플라이스토세 말의 토기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당시 점유 밀도 자체가 크게 떨어진 탓일 것이다. 급격한 기온 상승으로 이때가 되면 최후 빙하 극성기 내내 육지로 노출되어 있던 서해[황해분지]에 바닷물이 들어차 오늘날 한반도의 모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토기는 수렵채집 사회의 맥락에서 발견되는데, 아마도 물고기와 조개류 등을 끓이는 용도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플라이스토세의 끝자락이며 수렵채집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만약 토기를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요소라 판단한다면 신석기시대의 흐름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종말기 구석기시대, 곧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이는 굳이 중석기시대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도 환경 변화와 수렵채집의 지속, 토기의 제작과 사용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