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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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 / 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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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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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묘지나 택지를 선정할 때 지질과 길흉을 판단하는 종교인.
내용

우리 나라 민속에서 쓰이는 말이며, 중국에서는 지관이라 부르지 않고 감여가(堪輿家)·풍수가(風水家)·풍수라고 한다. 원래 지관은 중국 고대의 관직명이었다. ≪주례≫ 지관편(地官篇)의 지관은 천관(天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 등과 더불어 6관의 하나였다. 이 지관은 중국 삼공(三公:大司徒·大司馬·大司空)의 하나인 사도(司徒)로 국가의 교육을 맡아 학교를 관리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는 호부(戶部)에 지관을 두어 금전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뒤에 다시 호부로 환원시킨 일이 있다. 또한 지관은 신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중원일(中元日)인 음력 7월 15일을 맡은 신으로, 그날 사람이 1년 동안 행한 선과 악을 기록하여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준다고 한다.

묘지나 택지를 선정하는 사람을 감여가라고 하는 것은 감은 하늘, 여는 땅이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의 이치에 통한 사람으로 해석한다. 한 번 묘지를 쓴 곳이 비록 천하의 대길지라 하더라도 지운이 돌아오지 아니하였거나 망자에게 적합하지 아니할 경우 예기하지 아니한 재난으로 그 묘를 보전하지 못하고 파게 되는 수가 있다. 전에 장사지낸 사람이 흉지라고 파버린 곳에 뒤에 장사지낸 사람에게 발복이 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터가 흉지이기 때문이 아니고 지운이 돌아오지 않았거나 장지에 들었던 사람이 그 땅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관은 지리에만 통달할 것이 아니라 천문에도 밝아야 하며, 개인의 추명(推命:사주를 가지고 개인의 운수 등을 예측함)에도 능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감여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풍수지리설을 설명한 책을 ‘감여지’ 또는 ‘감여록’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지관을 ‘풍수가’ 또는 ‘풍수’라고 하는 것은 지관이 풍수지리설에 능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곽박(郭璞)의 ≪장경 葬經≫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내는 곳에는 생기가 있어야 한다. 이 생기라는 것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중지하게 되므로 생기가 뭉쳐서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흘러가지 못하게 머물러야 한다.”라고 풍수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풍수란 ‘바람과 물을 가린다.’는 뜻이라고 하며, 물은 항상 바람을 따라다닌다고 한다. 아무리 형국이 아름답고 주위가 길하게 생겼어도 바람이 막히지 않은 곳에는 물이 나게 마련이다. 특히, 곤신방(坤申方:곤방과 신방)에서 불어 오는 서남풍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곳은 아무리 지형이 높고 지국이 아담하게 생겼어도 백발백중 물이 난다고 ≪장경≫에 쓰여 있다.

이와 같이 바람이 불지 않고 물이 나지 않은 곳은 형국이 아름다우면 대길지가 되고, 형국이 혈(穴:정기가 모인 곳)을 배신하지 않으면 길지라고 한다. 지관은 이와 같이 바람이 불지 않고 물이 나지 않는 곳을 가리는 사람이므로 풍수가 또는 풍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 중국 문헌 및 인물

풍수지리설이 문헌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말기부터이다. 귀곡자(鬼谷子)왕허(王詡)가 손빈(孫臏)에게 전하여 준 ≪천서 天書≫ 3권 속에 풍수지리에 관한 설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청오 선생(靑烏先生)이 ≪장경≫을 남긴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뒤 한나라에 들어와서 풍수지리설을 연구한 사람이 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풍수가가 나와 당송시대에 와서 절정에 달하였다. 곽박·제갈량(諸葛亮)·회남자(淮南子)·갈홍(葛弘)·원천강(袁天罡)·이순풍(李淳風)·일행선사(一行禪師)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2) 우리 나라의 경우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말의 도선(道詵)을 가장 대표적인 풍수로 꼽고 있다. 도선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아버지 왕륭(王隆)에게 개성에 왕기가 서렸다고 예언한 뒤, 왕륭의 택지를 선정하여 주고 왕건의 출생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이바지한 공이 컸다. 그로 인하여 고려에서는 서운관(書雲觀)에 지리학교수를 두어서 국가의 궁전 건립과 능묘(陵墓)의 선정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이들을 어풍(御風)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관상감(觀象監)에 지리학교수와 지리학 훈도를 두어서 학교의 과목으로 지정하여 교육하도록 하였다. 풍수지리 사상은 민간의 생활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하여 민간에서도 연구가 활발하여 많은 풍수가가 나왔다. 특히, 사찰과 도관(道觀)에서 풍수지리설을 달통한 승려와 도인들이 많았으나 사찰이나 도관을 건립하는 부지 선정에 그쳤고, 민간을 위하여 행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지관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은 도선을 비롯하여 봉안 거사(鳳眼居士)·성 거사(成居士)·두사충(杜思忠)·이지함(李之菡)·서경덕(徐敬德)·남사고(南師古)·이준경(李浚慶)·유운룡(柳雲龍)·이자백(李仔柏) 등이 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명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각 마을마다 풍수라고 불리는 지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감여론(堪輿論)』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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