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의령, 진주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상남도 의령, 진주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이칭
이칭
강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함안군 · 창원시,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 · 사천시, 북쪽은 산청군 · 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53′∼128°22′, 북위 35°03′∼35°26′에 위치한다. 면적은 712.95㎢이고, 인구는 34만 442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5개 면, 16개 행정동(33개 법정동), 337개 행정리(124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다.

자연환경

중앙부에 남강이 관류하며 시가지를 북부와 남부로 양분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북쪽에 비봉산(飛鳳山, 139m), 남쪽에 망진산(望晉山, 172m), 동쪽에 선학산(仙鶴山) 등 1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 외각지구에 위치하여 저평한 시가지를 둘러싸는 형세를 취하며, 단지 동쪽과 남쪽은 남강유역의 평야부로 되어 있다. 시가지를 동서남북에서 둘러싸는 형세의 주변부는 북부 · 서부 · 동남부지역에 소백산맥의 지맥이 뻗어 내리고 있어 산지부가 나타나고 중앙부와 남부지역은 평지부와 낮은 구릉성저평지가 전개되고 있다.

대표적 산으로는 북서쪽에 광제봉(廣濟峰, 400m) · 국사봉(國士峰, 228m), 북쪽에 천황산(天皇山, 364m), 동쪽에 영봉산(靈鳳山, 395m) · 방어산(防禦山, 530m) 등이 있다. 그 밖에 월아산(月牙山, 471m) · 장군대산(將軍臺山, 482m) 등이 있다.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의 북부중앙을 곡류하면서 유역에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남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는 북부의 미천면에서 발원한 향양천(向陽川), 고성군 송구산에서 발원하여 금곡면 · 문산읍을 지나며 북류하는 영천강(潁川江), 산청군 감투봉에서 발원하여 단성면 · 수곡면을 지나며 진양호로 흘러드는 덕천강(德川江) 등이 있다.

남강은 하천의 범람이 잦아 1969년 홍수방지 및 관개, 발전의 목적으로 다목적댐을 구축하였다. 나동면 삼계리와 판문동사이에 댐을 막아 인공호인 진양호가 만들어졌는데, 물을 사천만(泗川灣)으로 방류하는 방법으로 가화천의 유로를 변경하는 등의 공사를 통해 낙동강 및 남강 하류지역의 수해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댐공사로 인해 대평면 · 나동면 일부지구는 수몰되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다습한 해양성기후의 특성을 띈다. 연평균기온 14℃, 1월 평균기온 1.1℃, 8월 평균기온 27.1℃이며, 연강수량은 1,701㎜ 내외로 우리나라에서 최대다우지역에 속한다.(2007년 기준) 지질은 중앙의 서부일대에는 선캄브리아기의 변성퇴적암과 화강편마암이 분포되고 있으나, 대부분 지역이 백악기 경상계 지층의 신라통과 낙동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생은 온대남동지구의 유형에 속해 편백 · 해송 · 리기다소나무 · 오동나무 · 탱자나무 · 대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역사

서부 경남의 젖줄인 남강유역을 따라 지수면 승내리와 대평면 내평리 석기산포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진주인근 지역인 수곡면 · 금산면 · 금곡면 · 대평면에서 신석기 유물이, 유곡동(진주), 대평면 · 집현면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유적으로 보아 진주지역에서는 적어도 서기전 2000년경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 42년경의 가야시대에는 가야연맹의 고령가야로 추정되고, 삼국시대 후기에 와서는 백제 영역 안에서 거열성으로 불려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685년(신문왕 5) 9주를 정비하면서 거열주를 청주(菁州)로 고치고 총관을 두었다. 그리고 757년(경덕왕 16) 전국의 지명을 고치면서 청주를 강주(康州)로 개칭하였다. 799년(소성왕 1) 강주를 다시 청주로 개칭했고 825년(헌덕왕 17) 청주를 다시 강주로 고치고 강주도독을 두었다.

936년(태조 19)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 강주를 진주로 개칭하였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면서 진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 5월 12목을 13절도사로 개정하면서 진주정해군절도사(晋州定海軍節度使)로 개칭, 9월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는 가운데 산남도에 영속되었고, 영(營)이 설치된다. 1171년(명종 1)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협주도(晋陜州道)로 양분된 진협주도에 영속되었으며 1186년 통합된 경상주도에 영속되었다. 1204년(신종 7) 경상주도가 경진안동도(慶晋安東道)로 개칭되었고 1298년(충렬왕 24) 경진안동도가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로 개칭되었다. 1314년(충숙왕 1) 경상진안도가 경상도로 개칭되고 1379년(우왕 5) 진주성이 축성되었다.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66년(세조 12)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도우부 진주진관을 두었다. 1519년(중종 14) 경상도를 좌 · 우도로 나누고 진주목은 경상우도에 영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시민 이하 3,800여 장졸들이 3만의 왜군을 맞아 전군이 몰살당하나 결국 승리하는 전과를 올려 진주성대첩으로 기록되었다. 1635년(인조 13) 종래의 4면 111리의 진주목 방리를 4면 62리로 통폐합하였다. 1832년(순조 32) 진주목읍지가 완성되었고 1862년(철종 13)에는 진주민란이 발생하였다.

1895년(고종 32)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는 가운데 진주는 진주부의 영(營)이 설치되어 관찰사를 두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고쳐져 군수를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국을 317군에서 218군으로, 4,315면을 2,517면으로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주군을 부화곡면에 이속, 함안군의 상봉면 · 하봉면 · 상사면을 편입하였다. 1931년 4월 진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에는 진주읍 소관인 7동 3리가 17정으로 개편되었고 이 때 진주군은 1읍 18면을 소관하였다. 1939년 10월 1일 진주읍이 진주부로 개편 승격되고 부윤을 두었다.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고 이 때 진주부는 17정 12리를 소관하였다.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 시장을 두었다. 또한 종래의 17정 12리가 37동으로 개편되었다. 1973년 7월 1일진양군 정촌면 가좌리 · 호탄리, 내동면 귀곡리가 진주시로 편입되었다. 1990년 3월 22일 망경남 · 북동을 망경동으로, 상봉동 · 서동을 상봉동으로, 수정남 · 북동을 수정동으로, 옥봉남 · 북동을 옥봉동으로, 상평동 · 서동을 상평동으로, 초전남 · 북동을 초전동으로, 이현남 · 북동을 이현동으로, 판문남 · 북동을 판문동으로 통합하였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진양군과 진주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진주시가 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문산면이 읍으로 승격, 10월 17일에는 문산읍 동물리를 두산리로, 갈촌리를 갈곡리로, 진성면 중촌리를 동산리로, 이천리를 구천리로, 지수면 승내리를 승산리로 각각 개칭되었다.

유물 · 유적

구석기유적은 대평면 내촌리에서 발견되었으며,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상촌리에서 주거지와 즐문토기, 화장한 뼈를 담은 옹관, 환호 등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으로 귀곡동 대촌지석묘는 3기만 남아 있고 동시대의 대촌 주거지는 원형이다.

불교 유산으로는 197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집현면 정평리의 응석사에 응석사대웅전, 망경동의 사월리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 금산면 갈전리의 청곡사대웅전(靑谷寺大雄殿) ·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국보, 1997년 지정),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곡사삼층석탑이 있다.

이 외에도 상문리의 두방사 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수곡면 원내리의 고산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 이반성면 용암리의 용암사지 승탑(보물, 1963년 지정)와 용암사지 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이 남아 있다. 그리고 수곡면의 묘엄사지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평거동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상봉서동의 삼선암 동종(보물, 2010년 지정) 등이 있다.

진성면2의 상촌리지석묘군은 강변을 따라 1㎞의 범위에 모두 21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이반성면의 장안리지석묘에서는 마제석검과 마제석촉이 출토되었으며, 대곡면의 유곡리지석묘군은 9기의 기반식지석묘가 산재한다. 옥봉고분군은 6세기대에 축조된 고분군으로 백제와 대가야와의 관계 규명에 단서가 되는 고분이다.

미천면 오방리의 진주하륜묘역(경상남도 기념물, 1977년 지정), 수곡면의 진주수곡팔각형분묘군(경상남도 기념물, 1977년 지정), 명석면의 진주강수명묘역(경상남도 기념물, 1977년 지정), 진주평거동고분군(사적, 1968년 지정)이 있다. 이 밖에도 상보동고분군, 장재동고분군, 호탄동고분군, 가좌동고분군이 있다.

그리고 김광려 삼남매 화회문기(보물, 1990년 지정)는 1480년(성종 11)에 작성된 조선시대의 재산분배 기록이다. 그리고 사곡리의 주자어류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지수면 압사리의 김우옹 동강문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명석면 관지리의 하진 태계문집 목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한량무 · 장도장 · 진주삼천포농악 · 진주검무 · 연관장 등이 있다.한량무는 1979년 장도장은 1987년, 연광장은 1995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진주삼천포농악은 1966년,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성지로는 봉성동의 진주성(사적, 1963년 지정), 자은동의 구산성지(경상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 지수면 청원리의 방어산성, 대곡면 대곡리의 죽방산성이 있다. 호탄동 성지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와가미(川上久智)가 명군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망진산봉수는 사천 안현산 봉수에서 광제산으로 전하는 봉수였으나 흔적만 남아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옥봉동의 진주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금곡면 죽곡리의 남악서원, 지수면 압사리의 용강서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본성동의 의기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촉석 정충단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남성동의 창렬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귀곡동의 충의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대평면 하촌리의 도통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고건축물은 본성동의 촉석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2020년 지정), 남성동의 북장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서장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 영남포정사문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2020년 지정), 사봉면 사곡리의 우곡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대평면 대평리의 고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신풍리의 동산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가 있다. 고가옥은 대곡면의 진주마진리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지수면의 진주청원리이씨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가 있다.

남성동의 김해김씨비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본성동의 김시민 전공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 쌍충 사적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있다.

1988년 경상남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명석면 신기리의 명석자웅석, 아울러 수곡면 원계리의 이충무공진배미유적지(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남성동의 김해김씨비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 옥봉동의 강민첨탄생지(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 등이 있고, 남성동 국립진주박물관에는 중완구(보물, 1986년 지정) · 현자총통(보물, 1986년 지정) 등의 문화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금곡면의 진양 동예리느티나무(경상남도 기념물, 1991년 지정), 집현면의 진양 정평리무환자나무(경상남도 기념물, 1990년 지정)가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진주향교가 일찍부터 건립되어 있었다. 진주하연의 사교당기에 의하면 고려 목종 이전에 향교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진주향교의 강당인 사교당(四敎堂)을 세우고, 1558년(명종 13) 목사 김홍(金泓)이 동재 · 서재 · 명륜당, 풍화루를 중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탔다. 이후, 1603년(선조 36)부터 1607년까지 병사 이수일(李守一)과 김태허(金太虛)가 중건하였다.

진주향교는 경상우도 유림의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이래로 강민첨 · 강군보(姜君寶) · 하륜 · 정을보 · 정이오(鄭以吾) · 하연 등이 배출되었다. 향교 외에도 공립 교육시설로 서재가 있었다. 1566년 진주 목사 방승임이 부임, 동서남북 각 면에 서재(書齋)를 설치했는데 문산면 서직골에 동면서재, 지금의 수곡면 대천리 서직골에 서면서재, 지금의 정촌면 대축리 딧재서지먼당에 남면서재, 집현면에 북면서재, 정촌면 가좌리에 가좌촌서재, 원당리에 원당서재가 있었다.

사설 교육시설로 1610년(광해군 2) 수곡면 사곡리에 대각서원(大覺書院)이 설립, 1702년(숙종 28)금산면 가방리에 임천서원(臨川書院), 1718년 집현면에 신당서원(新塘書院), 1720년 정촌면에 정강서원(鼎崗書院), 1772년금산면 장사리에 경림서원(慶林書院)이 각각 설립되었다. 또, 1838년에 설립된 도동서원(道東書院)과 1841년에 설립된 평천서원(平川書院)이 있었는데 모두 고종 때에 철폐되었다. 그리고 1607년에 사액된 창렬사(彰烈祠)만 남아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제현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6년 경상남도공립소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초로 1909년 봉래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1910년에는 지금의 경남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인 진주공립실업학교가 개교하였다. 1925년에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개교하여 중등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40년에는 관립진주사범학교가 설립되어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1948년 경상대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의 전신인 도립진주농과대학이 설립되고, 이것이 1972년 경상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79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2023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4개교, 중학교 21개교, 고등학교 23개교가 있다. 대학으로는 진주교육대학교 · 경상국립대학교가 있으며, 진주보건대학교 · 연암공과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행사로는 1949년 영남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개천예술제가 있다. 이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에 단군의 개국사상과 임진왜란 때의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민족예술의 창조 정립을 위한 각종 행사를 거행하는 종합문화예술제로서 이 지방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편 2000년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신설되어 이 지방 문화축제로서 자리매김해오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소싸움이 있다. 줄다리기는 정월보름의 명절행사로, 혹은 봄 · 여름의 기우제행사로도 행해졌다. 집집마다 짚을 내어 동편이 수줄을, 서편이 암줄을 만들고 시합 때에는 두 줄의 용두머리에 비녀목을 꽂아 연결한 후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여 줄을 당긴다. 한 마을이 두 편으로 나뉘어 줄을 당길 때는 암줄이 이겨야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시합이 가열되지 않으나, 마을간의 시합 때는 이긴 마을이 풍년이 든다고 하여 농악을 치고 「쾌지나칭칭나네」 등 민요를 부르며 힘을 다해 겨룬다. 그러나 근년에는 거의 소멸되어 대동놀이로서의 맥을 잇지 못하고 있다.

소싸움은 팔월 추석 무렵에 남강 백사장에서 벌어졌다. 이 소싸움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곳에서 농우(農牛)를 많이 잡아먹어서 소들을 위령(慰靈)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 고려 말경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설 등이 구전되고 있다. 요즘도 추석이나 개천예술제 때에 공설운동장 혹은 남강변 고수부지에서 소싸움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이 밖에도 연날리기 · 널뛰기 · 윷놀이 · 고누 · 공기받기 등의 놀이가 있으며, 달집태우기 · 횃불싸움이 있었다 하나 현재 전승되지 않고 있다.

동제는 상봉동의 동신제가 비교적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음력 12월 20일 경 주민 중에서 깨끗한 이를 제관으로 뽑아, 정월보름날 자정에 당산나무 옆에 있는 당집에서 돼지머리 등의 제수를 차려놓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를 지낸다. 6·25동란 이후로 많은 동제가 소멸되었지만 일부 마을에서는 지금도 거행되는데, 그 중 사봉면 마성리의 동신제는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음력 12월 20일경에 마을사람 중 깨끗한 이를 골라 제관으로 선정, 정월보름날 자정 무렵 마을 뒤 큰 당산과 동구의 조산(造山)에 마을의 태평무사와 풍농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 특히 조산의 밥구덩에 메를 묻어야 마을이 평안하다고 하며, 조산에 손을 댄 사람은 큰 변을 당한다 하여 이를 무척 신성시하고 있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는 「운돌전설(鳴石傳說)」 같은 지명전설과 「정온전설」 · 「강목발전설」등의 인물전설이 다수 전승되고 있다.

고려 말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는데, 그 역사에 가담했던 스님이 명석면 동전리를 지나다가 암수 두개의 큰 돌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그 돌들은 진주성의 돌이 되고자 하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진주성의 역사는 이미 끝났다고 말하자, 돌들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감동한 스님은 “보국충석(輔國忠石)이여”하며 아홉번 절하였고, 이후 주민들은 명석각(鳴石閣)을 지어 두 돌을 모셔두고 매년 3월 삼짇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자웅석숭배(雌雄石崇拜)의 대상에 호국정신이 스며 전설화된 것이라 하겠다.

정온은 고려 말에 벼슬이 대사헌까지 올랐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굳게 지킨 충신이다. 이태조는 칙사를 보내어 사봉면 사곡리에 은거하고 있던 그를 모시려 하였으나, 선생은 눈이 어둡다며 거절하였다. 이를 의심한 칙사가 솔잎으로 선생의 눈을 찔렀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고, 이후 사람들은 그를 눈뜬 소경 정온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강목발은 대곡면 가정리에서 대방산 정기를 타고 태어났는데, 그만 생시(生時)가 나빠 대인(大人)이 못 되고 대적(大賊)이 되었다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도둑질을 잘하였는데 삼촌이 시험삼아 방바닥에 있는 엽전 한닢을 남몰래 가져보라고 하자 발바닥에 밥풀을 발라 감쪽같이 가지고 나왔다. 삼촌은 그가 장차 대적이 될 것을 염려하여 목침으로 때려 다리를 상하게 하였으므로 그때부터 목발을 짚고 다니게 되었다 한다.

또는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산모를 도와주다가 관가에 체포된 후 다리를 잘려 목발을 짚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강목발은 낮에는 목발을 짚고 절며 다녔지만, 밤에는 목발 없이 비호같이 다니며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집을 도와주는 의적이 되었다 한다. 이 밖에도 수곡면 사곡리에 살던 손수령(孫壽齡)의 부인이 숭늉그릇에 여덟 용이 노는 꿈을 꾸고 그 숭늉을 다 마신 후 대성할 여덟 아들을 낳았다는 「손씨팔룡전설」, 한 과부가 홀아비를 만나러 매일 시내를 건너는 것을 알게 된 아들이 돌다리를 놓아주었다는 대곡면 단목리의 「효불효교(孝不孝橋)전설」이 있다.

또,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송(松)자에 패한다는 예언을 듣고 임진왜란 때 송자가 들어간 마을은 침범하지 않아 금곡면 송곡리는 화를 면했는데, 실은 이여송(李如松)에게 패하고 말았다는 「송자에 패한 풍신수길 전설」, 신선이 용을 타고 하늘로 오르려는데 아낙네가 말을 하는 바람에 용머리를 땅에 처박고 산이 되었다는 문산읍의 「용두산 전설」, 이와 유사한 이반성면 대천리의 「선돌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은 남강을 낀 진주분지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농업이 발달하였고, 이런 지역적 배경으로 반촌(班村)이 많아서 농업기능요는 물론이고 효친을 비롯한 가족간의 정의를 노래한 민요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모심기노래」는 모를 심을 때 앞소리꾼이 4음보 1행을 노래하면 모심는 사람들이 뒷소리꾼으로 4음보 1행을 받아서 교환창으로 길게 이어 노래하며, 작업의 고단함을 잊고 능률을 향상시키는 민요이다. 모판에서 모를 캘 때, 모를 심을 때, 점심 때, 해가 질 때 등 가사가 구별되어 있으나 앞소리꾼이 부르다가 아는 가사가 다 되고 모심기가 남았을 때는 어떤 민요의 가사든지 아는 것을 부르므로 「모심기노래」는 가히 민요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모심기노래」의 좋은 대목은 독립되어 비기능요로 불리기도 한다.

「달풀이」는 “……슬프다 우리부모 어데가고/정월대보름날 망월할줄 모르는고……”라는 식으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심을 월령체로 노래하는 특이한 민요이다. 이 밖에 새댁이 남강에 빨래를 하러 가서 낭군을 만났으나 낭군이 못본체하고 집으로 가서는 아랫방에서 기생첩과 노는 꼴을 보고 자결하자 낭군이 그때야 후회한다는 내용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시집살이노래」는 이 고장을 배경으로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어랑어랑 에헤야/어루럴마두어야/몽땅 사랑이로다”라는 후렴을 각 연마다 부르며 육욕적인 사랑을 노래한 「어랑타령」은 이 고장에서만 전하고 있는 독특한 근세의 민요이다.

그 밖에 농업노동요로는 「보리타작노래」 · 「논매기노래」 · 「밭매기노래」, 길쌈노래로는 「물레노래」 · 「삼삼기노래」 · 「베틀노래」, 가족간의 정의를 노래한 민요로는 「부모노래」 · 「장모타령」 · 「사위노래」 · 「회갑권주가」 등이 있다.

산업 · 교통

용도지역면적은 주거지역 10.85㎢, 상업지역 3.41㎢, 공업지역 3.96㎢이며, 도시계획구역면적에 대한 점유비는 7.0%에 달한다. 시가지내 생산녹지 및 자연녹지를 포함하여 녹지지역으로 구분되는 잔여지역은 240.58㎢로서 대부분이 농경지 및 임야 등 농업활동에 이용되는 토지에 속하며 소위 "개발제한지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진주시면적은 69.56㎢에 불과하였으나, 1995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전에 진양군에 속했던 배후지의 방대한 농촌지역이 시로 편입됨으로써 시는 도농병진(都農倂進)의 도시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도 · 농 복합시로 농업의 비중이 여타 도시보다 높은 편이며 비옥한 토질, 알맞은 기후, 앞선 영농기술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설원예를 시작한 농업기술 도시며, 농업 특산품으로는 전국 최고 품질의 진주배와 단감을 비롯해 오이 · 딸기 · 고추 · 수박 · 피망 · 파프리카 · 호박 등 원예작물을 생산하여 일본과 동남아 등지로 대량 수출하고 있다.

총경지면적은 162.65㎢이며, 이중 논이 112.37㎢, 밭이 50.28㎢로서 각각의 점유비는 논 69.1%, 밭 30.9%로 되어 논이 밭보다 약 2.3배 가량 우세한 경작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남강 유역의 평야 및 남강댐 하류지역의 관개조건이 양호하기 때문이다. 시의 농가호수는 1만 5899호, 농가인구 5만 4080명으로서 시 인구에 대한 농가인구율은 16.2%에 달하여 도내 시부 총평균 농가인구율 8.8%의 배정도 농민을 수용하고 있으며 행정단위 중 가장 많은 농업종사자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농업생산은 시의 외각지역에서 주곡인 쌀을 위시하여 보리 · 콩 · 고구마 등이 경작되며, 부산 · 서울 등 대도시로의 출하를 목적으로 한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한 전천후 농업이 유명한 데, 특히 각종의 화훼작물과 멜론 · 딸기 · 토마토 · 고추, 그리고 채소류 등의 원예작물, 배 · 복숭아 · 밤 · 단감 등의 과수작물 등이 상업적 기업영농으로 대규모로 행해지며 전국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이 밖에도 지황 · 모란 · 잎당귀 · 양송이 등이 약용작물로 재배되고 있고, 대도시로의 우유 및 유가공품의 공급을 위한 축산업도 활발한 편이다.

2007년 말 현재 진주시의 총 사업체수는 2만 5535개 업체로 종사자 수는 9만 7483명이다. 1차 산업에서는 광업 5개 업체에 56명, 농업 및 임업 30개 업체에 311명 등이다. 제조업체는 2,384개 업체에 1만 2842명이 종사하고 있다. 서비스업종을 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이 대다수를 이루는데, 각각 8,626업체에 1만 6294명과 5,324업체이 1만 2347명이 종사하고 있다. 건설업에는 803개 업체, 금융보험업에는 334개 업체가 있다.

서비스업부문에서 제조업분야보다 3배 정도의 고용구조를 지니고 있음은 서부 경남지역의 거점도시로서 지니는 중심도시로서의 기능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서부 경남 상권의 중심이며 교육 · 문화 도시의 특성으로 인해 1·2차 산업에 비해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지역 여건과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 관광 · 물류 · 유통 등 고부가가치 산업과 생명공학 · 우주 항공 등 연구 중심 도시로 산업 구조 개편을 추진 중이며, 실크와 농산물 가공 산업을 지역 특화 산업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다.

시장은 대형마트 6개, 백화점 1개, 쇼핑센터 2개와 등록시장 20곳이 있다.

진주시는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경전선철도와 남해안고속도로가 동서로, 대전 · 진주 · 통영을 연결하는 중부고속도로의 일부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남으로는 사천시 북으로는 거창, 김천으로 통하여 바다와 육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항공교통도 인근의 사천공항과 인접하여 매우 편리하다. 남해고속국도와 대전∼통영간의 국도 2호, 3호, 33호선이 지나고, 이외에도 국도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1965년과 1968년에 각각 개통된 진삼선과 경전선을 비롯하여 진주시는 교통망이 방사상으로 발달한 교통 요지다.

관광

예로부터 예술의 고장이자 지방문화의 총본산인 유서 깊은 곳이다. 수려한 남강을 끼고 임진왜란의 상처를 많이 입은 유적들이 산재하고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강변 절벽 위의 촉석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로 고려 공민왕 때 창건하여 600여 년 동안 유지되다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재건하였다.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남강 변의 경치는 절경이다. 전시에는 장군이 지휘하는 장소로, 평소에는 관리들의 놀이터로 쓰였다고 한다. 그 밑의 절벽을 따라 남강에 이르면 2m 크기의 의암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것이 의기 논개가 왜장의 목을 껴안고 투신한 바위이다.

남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김시민을 비롯한 수많은 군졸들의 신위를 모신 창렬사, 왜구와 장렬히 전투하였던 승군의 본거지인 호국사가 있다. 시의 남서쪽 약 20㎞ 지점에 남강 상류를 막아 만든 인공호인 진양호는 수정같이 맑은 물과 울창한 주변 산림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이고, 특히 일출 광경이 장관이다.

그 밖에 북장대 · 서장대는 전란 때 장군이 군을 지휘하던 곳이고, 논개의 혼을 모셔놓은 의기사, 진주 유림의 고향인 진주향교, 봉이 날아가 버렸다는 데서 이름지은 비봉산의 경치는 진주의 명물이다. 판문동 · 귀곡동에 있는 진양호반의 진양호유원지와 가좌동의 석류공원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남성동,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거리는 고 미술품 업소의 대부분이 밀집되어 있는 민속품을 포함한 문화유산 등의 매매거리로 10여 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민속시장거리이다.

개천예술제는 1949년에 정부수립의 실질적인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제1회 영남예술제로 개최되었다. 1959년에 영남예술제에서 개천예술제로 그 명칭을 바꾸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진주남강유등축제와 서제, 개제식, 예술문화행사의 7개 부문에 60여 개의 행사가 다양하게 개최된다.

『의암별제』와『진주탈춤한마당』을 주축으로 만든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넷째주 금,토,일 3일간에 걸쳐 진주성에서 개최되며, 1868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이 창제한 것으로서 제향에 악,가,무가 포함되고 여성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제례인 의암별제를 서막으로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민속예술과 진주기생들이 남긴 교방문화와 탈춤과 대동놀이로 구성된다.

남성동에 소재한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에 진주성내에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에는 가야문화를 중심으로 한 박물관 이었으나 1998년에 역사박물관으로 재 개관하였다. 본관 건물은 우리나라 전통목조탑을 석조건물로 형상화한 것으로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대표작이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본성동의 향토민속관은 국내 유일의 장석전문전시관으로서 장석 8만여 점과, 목가구 20여점, 생활민속품 17여점, 장석제작도구 등이 진열되어 있다. 칠암동에 위치한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은 다목적 발표공간으로 대공연장, 소공연장, 놀이마당, 전시실, 부대시설 등을 갖춘 이 고장 종합문화예술의 전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가람문화거리는 이 고장의 전통과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지닌 도심 속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범 문화예술거리로 지정 조성되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단계(문화예술의 거리)와 2단계(역사의 거리)로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다. 진양교 · 문화예술회관 · 진주교 · 천수교에 이르는 칠암, 망경지구 남강변 일대에 위치한다.

신안동의 진주공설운동장을 비롯하여 문산읍의 문산공설운동장, 옥봉동의 남강실내아이스링크장, 상평동의 진주학생수영장 등은 대표적인 이 고장의 체육시설이다. 이외에도 진성면 상촌리에 진주컨트리클럽이 있으며 망진산 체육공원과 비봉산 체육공원 등 시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읍 · 면
  1. 문산읍(文山邑)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18㎢, 인구 9,000명(2015년 현재). 읍소재지는 삼곡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일동 · 이동 · 삼동 · 상이의 4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갈곡면(葛谷面)의 외동 · 내동 · 동곡 · 상촌 4개 리와 송곡면(松谷面) 일부, 이곡면 일부, 조동면 일부를 병합, 6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다시 정촌면의 옥산(玉山) · 동물(冬勿) 2개 리를 병합, 1995년에 읍으로 승격되고 동물리가 두산리, 갈촌리가 갈곡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북쪽에는 장군대산을 중심으로 구릉지가 발달하였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영천강이 남강과 합류하며 강유역에 평지가 펼쳐져 있다.

논경지는 총면적의 30%를 점유하고, 과수원이 많이 분포한다. 공장이 많이 위치하여 군내 유일한 공업지역이며 기계공업이 중심이다. 양송이 생산은 군 생산의 61%를 차지한다. 군내에서 가장 큰 가축시장이 열리는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진주의 관문으로 찰방(察訪)이 주둔하여 아전계층 중심의 문화가 형성된 곳이다. 동서로 남해고속도로와 진주∼마산 간의 국도가 통과하며, 남북으로 고성∼문산 간의 지방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삼곡리 고분, 상문리의 십삼층석탑, 이곡리의 조판서묘(曺判書墓)가 있다. 삼곡리의 느티나무는 읍 지정보호수이다. 삼곡(三谷) · 갈곡(葛谷) · 두산(斗山) · 상문(象文) · 소문(蘇文) · 안전(安全) · 옥산(玉山) · 이곡(耳谷) 등 8개 리가 있다.

  1. 금곡면(金谷面)

시의 남부 끝에 위치한 면. 면적 39.84㎢, 인구 2,50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두문리이다.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 송곡면이라 하여 정자 · 홍정 · 송곡의 3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동어면(金冬於面)의 우봉 · 가토 · 검암 3개 리와 성을산면(省乙山面)의 10개 리, 이곡면(耳谷面)의 이곡동 일부, 고성군 오읍곡면(吾邑谷面)의 동동 · 서동을 병합, 금곡면이라 하였다. 1939년진주군 금곡면에서 진양군 금곡면으로 개칭하였고 1995년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진주시 금곡면으로 개칭 되었다. 동쪽에 신흥뒷산, 서쪽에 무선산(無仙山), 남쪽에 봉대산(鳳臺山), 북쪽에 천황산 등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고성군에서 발원한 영천강이 면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남강에 합류한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24.2%를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고구마 등이 생산되고 양송이 재배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한우사육이 활발하고, 두문리에서 금곡가축시장이 열리고 있다. 중부고속도로의 일부인 대전~충무 간 고속도로가 2005년에 개통되어 연화산도립공원(옥천사)과 금곡면이 접하는 IC가 면사무소에서 1㎞ 지점에 설치되어 서울은 4시간대 진입함으로써 각종 물류를 원할히 수송함으로써 교통의 요충지로써 자리잡고 있다. 고성∼문산 간의 지방도는 면을 남북으로 지나간다.

문화유적은 검암리와 성산리에 고분, 임진왜란 때 축성된 덕계산성(德溪山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죽곡리에 남악서원, 검암리에 하진사사당(河進士祠堂)이 있다. 동례리 · 죽곡리 · 두문리에는 1,0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지정보호수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

두문(斗文) · 죽곡(竹谷) · 성산(省山) · 검암(檢巖) · 가봉(佳峰) · 송곡(松谷) · 정자(亭子) · 인담(仁潭) · 동례(東禮) 등 9개 리가 있다.

  1. 금산면(琴山面)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1㎢, 인구 2만 304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사리이다.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 금산면이라 하여 개천 · 중촌 · 미암 · 백동 · 월아의 5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여촌면의 남성 · 기동 · 가방 · 사동 · 용심 등의 5개 리와 조동면의 호암 · 갈전 · 속사 등의 3개 리를 병합하였다. 최근 주거지역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어 인구가 급격히 증가되고 있다. 장군대산과 월아산이 비교적 높게 솟아 있으며, 진주시에서 흘러 온 남강과 고성군에서 흘러온 영천강이 남서쪽에서 합류하여 면의 서쪽과 북쪽을 감싸고 있다. 용아리에는 축조연대가 오래된 금호지가 있다.

경지는 총면적의 33.3%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을 생산하고 양송이 재배도 활발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오이 · 호박 · 고추 · 참외 · 토마토 · 딸기 등의 고소득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특히 금산 단감과 금산 배는 그 맛이 매우 유명하다. 교통은 소문∼가방간의 군도가 면을 남북으로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용아리의 선사유적지에서 마제석검이 출토되었고, 갈전리에 청곡사가 있으며, 용아리에 있는 이퇴계비(李退溪碑)는 이황(李滉)이 금호지에 휴양 차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그의 시를 적은 비이다. 중천리의 느티나무는 면 지정보호수이다.

장사(長沙) · 가방(加芳) · 용아(龍牙) · 중천(中川) · 송백(松栢) · 갈전(葛田) · 속사(束沙) 등 7개 리가 있다.

  1. 내동면(奈洞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11㎢, 인구 4,34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독산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독산 · 영강 · 신촌 · 율동의 4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축곡면의 산기 · 마동 · 내평 · 연향 · 수거 · 유동의 6개 리와 섭천면의 2개, 곤명면 일부, 그리고 가리면 가화동 일부를 병합, 7개 리를 관할하였다. 938년 진주읍에 천전 · 주약 2개 리를 넘겨주고 귀곡리를 편입하였고, 1973년 다시 귀곡리를 진주시로 넘겨주었다. 하동방면에서 흘러온 남강이 북쪽을 관류하고 있어 약간의 평지를 이루나, 동쪽은 실봉산을 중심으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인공호인 진양호의 축조로 내평리 등 많은 동리가 수몰되었고 유수리 쪽으로는 방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약 30%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마늘 등이 생산되며 특히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오이 · 야채 등 시설작물이 재배가 된다. 경사지에 목장이 발달하여 7개에 이른다.

경전선이 면을 횡단하여 곤명면으로 빠지고 진주∼하동 간의 국도가 지나간다. 그리고 유곡~정촌 간 국도대체 우회 도로가 이 고장을 관통하여 교통의 요충지로서 발전가능성이 있다.

문화화유적은 독산리에 고분, 삼계리 · 내평리에 고분이 있으며, 독산리의 마고산성(馬古山城), 내평리의 녹도산성(錄道山城) 등이 있다.

독산(篤山) · 삼계(三溪) · 신율(新栗) · 유수(柳樹) · 내평(內坪) 등 5개 리가 있다.

  1. 대곡면(大谷面)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5.87㎢, 인구 3,78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석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마진 · 대동 · 하촌 · 덕곡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죽면(沙竹面)의 유곡 · 대포 · 지석 등 5개 리와 설매곡면(雪梅谷面)의 하감 · 상감 · 창촌 등 5개 리, 대여곡면(代如谷面)의 송곡 · 미천 · 정성 · 고동의 4개 리를 병합하였다.

전체에 산지가 분포하며 남북으로 대곡천(大谷川)이 가로지르고, 남서쪽에서부터 남강이 감싸듯이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지형으로 경치가 좋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약 30%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이 생산된다. 남강을 이용한 관개시설로 시설원예재배의 적지로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양잠업이 성해 뽕밭이 넓게 분포하였다. 최근에는 와룡리를 중심으로 비닐하우스 재배가 활발하다. 진주∼마산 간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유곡리의 지석묘군, 와룡리의 고분군, 설매리의 고분군, 대곡리에 죽방산성의 흔적이 있다.

광석(廣石) · 설매(雪梅) · 월아(月牙) · 유곡(楡谷) · 단목(丹牧) · 와룡(臥龍) · 가정(佳亭) · 덕곡(德谷) · 마진(麻津) · 대곡(大谷) · 월알(月巖) · 용암(龍巖) 등 12개 리가 있다.

  1. 대평면(大坪面)

시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05㎢, 인구 1,18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촌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대평면의 대평 · 어은 · 옥방의 3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풍면(新豊面)의 5개 리와 마동면(馬洞面)의 2개 리, 침곡면(針谷面)의 3개 리, 사천군 곤명면의 본촌동 일부를 병합, 6개 리로 개편하였다. 이 면의 중앙을 남강이 남북으로 가로지르는데 최근 진양호의 축조로 많은 지역이 수몰되었으며, 대평리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논경지는 총면적의 약 10%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등 식량 작물이 생산된다. 농산물로는 신풍리에서 나오는 대평무가 육질이 치밀하고 맛이 독특하여 예로부터 유명했으나, 저장상의 어려움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수곡면과 연결되는 지방도로가 이 면의 남북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산지가 많아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상촌리 · 대평리의 지석묘군과 대평리 옥방마을의 무문토기편 등이 남아 있다. 대평리의 고산정, 신풍리에 동산재, 하촌리의 도통사(道統祠)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제석산성(帝釋山城)과 내촌리 성지 등이 있다.

상촌(上村) · 대평(大坪) · 하촌(下村) · 신풍(新豊) · 당촌(堂村) · 내촌(內村) 등 6개 리가 있다.

  1. 명석면(鳴石面)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9.31㎢, 인구 4,56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관지리이다. 본래 진주군 지역으로 명석면의 장흥 · 석방 · 남성 · 추동 · 왕지 등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오산면(吾山面)의 가동 · 화지 · 삼항 · 오미 · 묵곡 등 5개 리, 성태동면(省台洞面)의 관지 · 신촌 · 덕곡 · 엄목의 4개 리, 대평동, 신풍면 중동 일부, 단성군(丹城郡) 오도면 토현동을 병합, 명석면이라 하고 9개 리를 관할하였다. 이후 1938년 평거면의 우수 · 용산 2개 리를 편입하여 11개 리가 되었다. 대체로 산지가 많으며 나불천(羅佛川)이 남북으로 관류하여 남강으로 흐른다. 그 밖에도 작은 하천들이 많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13.7%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을 생산하며 양잠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산청∼진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면을 남북으로 지난간다.

문화유적은 관지리 · 용산리 · 왕지리에 고분, 덕곡리 · 외율리에 성지가 있다. 용산리의 초당(草堂)은 이 지역 주민의 휴식처이다.

관지(觀旨) · 용산(龍山) · 왕지(旺旨) · 우수(雨水) · 남성(南星) · 계원(桂垣) · 덕곡(德谷) · 신기(新基) · 오미(五美) · 외율(外栗) · 가화(佳花) 등 11개 리가 있다.

  1. 미천면(美川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62㎢, 인구 1,8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방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반지 · 세곡 · 삭성 · 진교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설매곡면(雪梅谷面)의 신촌 · 오방 · 덕진 · 상미 · 하미 등 11개 리를 병합,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대체로 산지로 이루어져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적다. 대곡면과의 경계에 약간의 평지가 전개되며, 향양천 · 정수천 등이 발원하여 남강으로 흘러든다. 전체 면적의 78%가 임야로 소득작목으로 밤나무를 1,220ha 식재하여 높은 소득을 올린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17.1%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이 생산된다. 양잠업이 활발하여 뽕나무가 많다. 특산물로 양송이가 재배되며 안간리에 가축시장이 열린다. 진성∼미천 간의 지방도가 중앙을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오방리에 진양부원군신도비가 있다.

오방(梧坊) · 향양(向陽) · 반지(班池) · 벌당(伐塘) · 어옥(於玉) · 상미(上美) · 미곡(美谷) · 안간(安磵) · 효자(孝子) 등 9개 리가 있다.

  1. 사봉면(寺奉面)

시의 중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1.96㎢, 인구 1,6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사곡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상사면(上寺面)이라 하여 마사 · 시성 · 방촌 · 중촌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봉면(上奉面)의 봉대 · 모곡 · 화계 · 부다의 4개 리, 하봉면(下奉面)의 임내리 일부, 일반성면의 창촌동, 진성면의 원당 · 온수 · 천곡의 각 일부를 병합, 상사와 사봉의 뒷글자를 따서 사봉면이라 하고 진양군에 편입되었다. 100m 내외의 낮은 산지가 많은 편이며, 반성천(班城川)이 면의 중앙을 가로질러 남강에 합류한다. 반성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밖에 작은 하천이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32.6%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이 고장에는 진주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사봉농공단지 등 생산도시기반 조성지역이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와 경전선이 통과하며, 사봉∼함안 간의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무촌리 · 봉곡리 고분과 마성리 산록에 토성의 흔적이 있다. 사곡리에는 정온의 유적으로 정각 · 대문 · 유허비가 남아 있다. 마성리의 제월대가 있다.

사곡(沙谷) · 마성(馬城) · 무촌(武村) · 방촌(芳村) · 봉곡(鳳谷) · 부계(富溪) 등 6개 리가 있다.

  1. 수곡면(水谷面)

시의 서부 끝에 위치한 면. 면적 42.49㎢, 인구 1,6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천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효자 · 중전 · 하동 · 요산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당면의 내동 · 외동 일부와 대각면(大覺面)의 사곡 · 대우 · 자매 등 3개 리, 마곡면의 당촌동 일부, 사천시 곤명면의 본촌동과 산청군 백곡면(栢谷面)의 대우동 일부와 파지면(巴只面)의 덕동 일부를 병합, 오늘에 이른다. 산청군에서 흘러온 덕천강이 면의 서쪽에서 남쪽으로 감싸 흐르며, 자매리에서 발원한 자매천이 원외리에서 합류, 진양호로 들어간다. 원외리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전개되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24.6%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고구마 등이 생산되고 양잠업이 발달하여 군내 최대의 뽕밭을 확보하고 있다. 최근에는 돗자리의 재료로 쓰이는 인초(藺草)를 재배하여 농가소득에 큰 몫을 담당한다. 교통은 원내∼원계를 연결하는 군도가 중앙을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자매리와 원내리에 고분군, 효자리의 삼층석탑, 원내리 고산사지(古山寺址)의 비로자나불 · 석불좌상 등이 있다. 원계리에는 이순신이 군사를 훈련하던 이충무공진배미유지가 남아 있다.

대천(大泉) · 자매(紫梅) · 사곡(士谷) ·2원계(元溪) · 창촌(昌村) · 효자(孝子) · 원내(元內) · 원외(元外) 등 8개 리가 있다.

  1. 이반성면(二班城面)

시의 동부 끝에 위치한 면. 면적 42.58㎢, 인구 1,76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암리이다. 본래 반성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이반성면이 되어 용암 · 간동 · 하서 · 하동 · 하중의 8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수개면(可樹介面)의 5개 리와 외진성면(外晉城面)의 답천동 일부와 양진면의 발산리를 합하여 8개 리가 되었다. 동쪽에 영봉산, 북쪽에 오봉산, 남쪽에 만수산(萬壽山) 등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으로는 반성천이 흐르며 하천유역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약 20%이며, 주요 농산물은 쌀 · 콩 · 고구마 등이 생산된다. 특산물로 양송이 재배가 활발하다. 전형적인 미 · 맥 위주의 농업구조이나 사이버타운의 운영으로 농촌정보화사업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길성리 수성에는 농공단지가 위치하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이 북서부를 통과하며 목포∼부산 간의 국도가 남쪽을, 사봉∼함안 간의 지방도가 서쪽을 지나갔으나, 2012년 마산~진주 간 복선화로 인해 이반성면에 위치한 평촌역이 폐역되었다.

문화유적은 용암리에 사지부도 · 석불좌상, 장안리에 성전암(聖殿庵)이 있다. 이 밖에도 대천리의 작당산성(鵲堂山城) · 사충각비(四忠閣碑)가 있다.

용암(龍巖) · 장안(長安) · 평촌(坪村) · 하곡(荷谷) · 가산(佳山) · 대천(大川) · 길성(吉星) · 발산(鉢山) 등 8개 리가 있다.

  1. 일반성면(一班城面)

시의 동남부에 있는 면. 면적 19.44㎢, 인구 3,02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촌리이다. 본래 반성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일반성면이 되어 창촌 · 선동 · 채동 · 개암 · 가곡의 5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외진성면의 성분 · 포곡 · 설천 등 10개 리와 내진성면의 원동 · 온정 · 백암 · 두목리 등의 일부와 함안군 상사면의 다무동을 병합하였다. 북쪽은 반성천이 흐르면서 연변에 평야가 발달하고 있으며, 북서쪽에 매화산(梅花山), 남쪽에 보잠산(寶岑山) 등의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26.8%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마늘 등이 생산되고 양송이 재배도 성하다. 남쪽 산지에서 축산도 활발하여 닭과 돼지 사육두수가 시역내 최고이다. 창촌리에 가축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경전선 철도및 국도2호선이 통과하며 반성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개암리와 운천리에 석탑 · 방어대장군조충절공묘비(防禦大將軍趙忠節公墓碑)와 양무원종공신유허비(揚武原從功臣遺墟碑) 등의 비가 있으며, 운천리에 매화산성, 남산리에 보잡산성지가 있다.

창촌(倉村) · 운천(雲川) · 가선(佳仙) · 개암(開巖) · 답천(畓川) · 남산(南山) 등 6개 리가 있다.

  1. 정촌면(井村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6.74㎢, 인구 3,15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화개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가좌 · 장좌 · 호탄 · 원촌 · 정동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지공면(枝貢面)의 여물 · 상동 등 5개 리와 가차례면(加次禮面)의 상동 · 하동 일부, 문산면(文山面)의 옥산동과 이곡면(耳谷面)의 어수동, 송곡면의 정자동 일부와 사천군 북면의 관을동을 병합, 정촌면이라 하였다. 동쪽의 산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평탄한 100m 이하의 구릉지이다.

전체면적의 88.6%가 녹지지역이며 농경지는 이중 30.4%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무 · 배추 · 소채 등이다. 특산물로 양송이 재배가 활발하고, 도시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오이 · 고추 · 참외 · 딸기 등이 재배된다. 남해고속도로와 남해∼기산 간의 국도가 중앙을 통과하며, 경전선과 진삼선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문화유적은 화개리에 고분, 가좌리 삼곡사(三谷寺)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면 청곡사에서 옮겨온 불상이 있다. 화개리의 느티나무는 면 지정나무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

화개(花開) · 관봉(官鳳) · 소곡(所谷) · 예상(禮上) · 예하(禮下) · 대축(大杻) 등 6개 리가 있다.

  1. 지수면(智水面)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0.96㎢, 인구 1,70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승내리이다. 본래 김해군 지역으로 하봉면이라 하여 청담 · 용봉 · 승산 · 동지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상봉면의 청원 · 필동 · 뇌동의 3개 리를 병합했으며, 1995년 승내리가 승산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북쪽에 방어산이 비교적 높게 솟아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평야가 넓게 전개된다. 남강이 북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지수천과 대필천 등 작은 하천이 흘러든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31%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 양파 등이 생산되며 비닐하우스에서 시설작물도 재배한다. 과수원이 4,622㎡로 진주시 과수원면적의 0.7%이다.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함안군과의 경계에 방어산성과 청원리에 사지, 압사리의 용강서원(龍崗書院)이 있다.

승산(勝山) · 청원(淸源) · 금곡(金谷) · 압사(鴨寺) · 용봉(龍奉) · 청담(淸潭) 등 6개 리가 있다.

  1. 진성면(晋城面)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41㎢, 인구 2,20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촌리이다. 조선 초기에는 진주목 동면의 4개 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895년 내진성면, 가좌촌면으로 개편하였고 1914년 2개 면을 통합하여 진성면(晉城面)이 되어 이천 · 천곡 · 온수 · 대사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좌촌면의 상촌 · 중촌 · 하촌의 3개 리를 병합하고 이름도 조선시대의 진성면이라 하여 7개 리로 개편, 1995년 중촌리가 동산리로, 이천리가 구천리로 각각 개칭되었다. 사봉면에서 흘러온 반성천과 면의 북쪽을 흐르는 남강이 하촌리에서 만나 이 부근은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쪽은 대체로 산지가 많으며 월아산과 장군대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다.

농경지는 총 면적의 23.2%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 식량작물이 주로 생산되고 그밖에 양송이가 많이 재배된다. 산간 경사지에 목장이 있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와 마산∼진주간의 국도가 지나간다.

문화유적은 대사리에 연대 미상의 고분이 있고, 예로부터 주요 방어지역인 관계로 남강연안에 장군대산성 · 월아산성 등의 산성이 남아 있다. 신촌리의 충노비(忠奴碑)는 조선 숙종 때 함양박씨의 충성스러운 종의 공적을 기록한 것으로 양반과 상민의 사회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상촌(上村) · 대사(大寺) · 온수(溫水) · 구천(龜川) · 동산(東山) · 천곡(泉谷) · 하촌(下村) 등 7개 리가 있다.

  1. 집현면(集賢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23㎢, 인구 5,29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강리이다. 본래 진양군 지역으로 봉평 · 덕동 · 원동 · 지내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물곡면의 중촌 · 하촌 · 기동 · 사촌 · 관동의 5개 리, 모태곡면의 철수 · 건정 · 정자 등 6개 리, 사죽면의 장흥 · 신당 · 죽산 등 7개 리, 미천면의 원당동과 장재곡면의 장재곡동 일부를 병합하였다. 1938년 진주읍 구역확장에 따라 하촌리를 진주시에 넘겨주었다. 전체적으로 산지가 많은 지형으로 북쪽에 집현산이 있으며, 중앙에 약간의 평지가 발달하고 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21.8%를 차지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고구마 등을 생산한다. 최근 비닐하우스 재배가 활발하여 시설채소의 주산지가 되어 오이 · 호박 · 고추 · 참외 · 토마토 · 딸기 등이 다량 생산된다. 그 밖에 양송이와 산딸기가 재배되고 있다. 고성∼선산 간의 국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지방도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사촌리 · 정평리 · 정수리 · 냉정리 · 신당리 · 덕오리에 고분, 정평리에 응석사가 있다.

봉강(鳳降) · 지내(池內) · 사촌(沙村) · 대암(大巖) · 정수(亭水) · 정평(亭坪) · 냉정(冷井) · 장흥(長興) · 신당(新塘) · 덕오(德梧) 등 10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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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www.jin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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