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와 상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1910년 본토인 뉴욕으로 이주해 해외지역 한인의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뉴욕지회에 가입해 조국의 독립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에는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이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회관의 임대료를 출연하는 등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자, 이 대회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그 해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5대열강회의에 맞춰 대한민족대표단을 조직하고, 국내 및 상해 임시정부과 연락해 ‘대한 인민의 건의서’를 작성·제출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에 뉴욕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로부터 특별의연금 220여 달러를 모금해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에 파견되어 동년 4월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열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했으며, 임시정부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천세헌은 임시정부의 개선이 어려워지자 1923년 미국으로 돌아와 음식점을 경영하며 가난한 한인들을 도와 ‘한인들의 은사’라고 불리워졌다. 1933년에는 시카고에서 한민족을 업신여기는 일본인 마쯔에[松江]를 처단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193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하기 위해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서재필의 지시를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해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자금을 출연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1945년 6월에 서거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