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경주부윤, 충청도관찰사, 해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청원(淸源)
서촌(西村), 쌍백당(雙栢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53년(명종 8)
사망 연도
1616년(광해군 8)
본관
해주(海州)
주요 관직
해주목사
관련 사건
계축옥사
정의
조선 후기에, 경주부윤, 충청도관찰사, 해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쌍백당(雙栢堂). 최문손(崔文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선(崔璿)이고, 아버지는 선전관 최여개(崔汝漑)이며, 어머니는 현감 허운(許雲)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고 저작 겸 봉상시직장·검열·대교·지평 등을 거쳐 1604년에 정주목사로 나갔다.

그 뒤 우승지, 형조·호조의 참의, 장례원판결사 등을 거쳐 1607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뒤에 개성부도사, 숙천·동래·경주부윤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부 명나라 원군들이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창고의 곡식을 다른 곳으로 은닉시켜 백성들을 보호하는 등 일을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적으로 잘 처리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그는 또한 달천교(達川橋)의 목교(木橋)를 석교(石橋)로 대체하여 민폐를 덜어주었으며, 수로를 개통하여 논을 만들어서 벼농사를 짓게도 하였다.

1616년 해주목사로 있을 때 앞서 1613년의 계축옥사에 관련되어 해서(海西) 산곡으로 모여든 도당을 회유하여 돌려보냈는데, 그 가운데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함으로써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남형죄(濫刑罪)로 투옥,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고 뒤에 또다시 대역죄로 몰려 부관참시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숙천·밀양·정주 등에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낙전당집(樂全堂集)』
『청음집(淸陰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집필자
이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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