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은 고려후기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화기들을 제조한 발명가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나 1395년(태조 4)에 사망했다. 무관이던 그는 왜구의 노략질을 방어하기 위해 화약과 총이 절실함을 깨닫고 연구를 시작했다. 엄청난 공을 들여 화약 제조법을 알아내고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본격 제조에 들어가 대장군·이장군·삼장군 등 총포, 화전·철령전 등 발사물, 질려포·철탄자와 로켓무기인 주화까지 총 18가지 화기를 제작했다. 1380년에 쳐들어온 왜구의 500여 척의 선박을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가 싸워 격파했다.
본관은 영주(永州: 현재의 영천).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처음 제작, 사용하였다. 무관인 그는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연구에 임하였다.
그 결과,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 · 유황 · 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李元)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후하게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으로 이원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抽出)하는 방법을 배우고, 드디어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간단한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火箭)등을 만들어 실험해 본 그는, 마침내 자신을 얻어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몇 번에 걸쳐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끝에 허락받아 우리나라에서 화약과 화약무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1377년 10월부터 시작하였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大將軍) · 이장군(二將軍) · 삼장군(三將軍) · 육화석포(六火石砲: 완구의 일종) · 화포(火砲) · 신포(信砲) · 화통(火筒) 등이며,
화전(火箭) · 철령전(鐵翎箭) · 피령전(皮翎箭)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 · 철탄자(鐵彈子) ·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 유화(流火) ·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왔을 때 원수(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에서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라는 벼슬까지 올랐으며, 조선 초에는 나이가 많아 등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의 공을 생각하여 의정부우정승(議政府右政丞)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 최해산(崔海山)과 손자 최공손(崔功孫)도 화약과 화기 연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