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재(未能齋). 영의정 최항(崔恒)의 6대 손이며, 최준원(崔濬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언수(崔彦粹)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최영(崔潁)이며, 어머니는 현감 송구(宋駒)의 딸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이 되어 5, 6년간 그를 보필하였다. 그 뒤 검열·예문관봉교·헌납·지평·장령·사간·교리 등을 역임하고 1602년 사간을 끝으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정인홍(鄭仁弘)이 화심(禍心)을 품고 있다고 첫눈에 알아 보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호남을 내왕할 때 쌀을 가지고 다니며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아들 최연(崔葕)의 공으로 대사헌에 가증되었으며,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