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11명이 한 팀이 되어 발로 공을 차서 몰고 들어가 상대편 골문에 넣음으로써 승패를 겨루는 경기이다. 팀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중요시된다. 경기 시간은 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이며, 15분간의 하프타임이 있다. 서양이 먼저 스포츠로서 발전시켰을 뿐 우리나라·중국·일본 등에서도 옛날부터 행하여지고 있었다. 조선 말기에 서양식 근대축구와 공이 들어오면서 현재와 같은 축구가 보급되었다. 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일본과 공동으로 개최했다.
발을 주로 사용하며 스피드가 있고, 각종 기술의 순간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는 남성적인 운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한 팀이 11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팀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매우 중요시된다.
90∼120m의 터치라인, 45∼90m의 골라인으로 된 직사각형 경기장 내에서 이루어지며, 경기시간은 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으로 총 90분이고, 15분간의 하프타임이 있다. 공은 둥근 가죽제품으로 되어 있으며, 바깥둘레 68∼71㎝, 무게 369∼453g이다. 가죽 색깔은 흰색 또는 흰색과 검은색을 섞어서 꿰맨 두 가지가 공인되어 있다.
경기는 공을 가지고 두 팀이 중앙선의 센터 서클 중앙에서 앞으로 킥오프(kick-off)하면서 시작하여, 킥 · 드리블 또는 헤딩으로 패스, 상대편 골에 슛을 하여 성공하면 1점을 얻는다. 또한, 페널티에어리어 안에서 고의로 반칙을 당하였을 때, 페널티킥마크에서 공을 차서 직접 골에 들어가면 득점이 된다.
심판은 주심 1명, 선심 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심은 경기의 진행과 각종 결정을, 선심은 볼이 경기장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볼이 어느편의 것인지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축구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기원전 6, 7세기 경 고대 그리스에서 행하여지던 하패스톤(Harpaston)이라는 게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경기가 로마에 전하여져 무사들의 훈련이나 군대스포츠로 발전하다가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략하였을 때 영국에 소개되었다.
그 뒤 11세기 덴마크가 영국을 점령하였다가 물러간 뒤 그들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덴마크인의 두개골을 발굴, 하패스톤 경기를 함으로써 마음껏 울분을 풀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에 퍼졌고, 근대축구경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다.
영국에서의 초기 축구는 선수의 수도 제한이 없었고, 골도 1마일 가량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간 제한도 없었다. 특히, 사순절 전의 화요일은 평민 모두가 참가하는 축구의 날이 되어 군중이 직접 축구를 하거나 관람자로서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규칙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때인데다가 참가자 수가 너무 많고 승패에 집착하여 경기가 거칠고 싸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위기간(1314∼1581) 동안에는 법으로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평민들에 의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 청교도 시대의 종말과 함께 운동이 부활되자 축구경기는 대단한 환영을 받으면서 재개되었다. 영국의 각 학교는 제한된 운동장 공간에 맞추기 위하여 변형 응용시켰으며, 이러한 추세는 고등학교로부터 옥스포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뻗어나갔다.
1862년 드링(Thring,J.C.)은 최초의 경기규칙을 작성하였는데, 선수의 수는 10명으로 되어 있었다. 1863년 많은 팀의 대표들이 런던에 모여서 영국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를 결성하고 드링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이 규칙을 받아들인 팀들은 어소시에이션풋볼(Association Football)팀이라 부르다가 그 뒤에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와 구별하기 위하여 축구(soccer)라고 고쳐불렀다. 이 때문에 경기의 이름이 풋볼에서부터 어소시에이션풋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경기는 영국으로부터 유럽의 다른 나라로 퍼져갔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확산되었다. 1904년 이전에 이미 전세계에는 각 국가별로 40개의 축구협회가 창립되었다. 1904년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되어 경기규칙을 단일화시킴으로써 어느 나라에서나 모두 단일화된 경기규칙 아래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1908년에 개최된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 때부터 축구가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 국제축구연맹의 가맹국은 점차 늘어나서 축구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97년 말 현재 FIFA가맹국은 198개국이다.
축구와 비슷한 운동은 서양이 먼저 스포츠로서 발전시켰을 뿐 우리나라 · 중국 · 일본 등에서도 축구운동경기는 옛날부터 행하여지고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축국(蹴鞠)’이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우리나라 축구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는데,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자락을 잘못 밟아 옷고름이 떨어져나갔다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도 고구려인들은 축국을 잘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축구와 같은 운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고, 조선 초기까지 전하여 내려왔으나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에 그 빛을 잃게 되었다. 한편, 조선 말기에 서양식 근대축구와 공이 들어오면서 현재와 같은 축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882년(고종 19) 영국군함 플라잉호스(Flying Horse)가 입항시 군인들에 의하여 소개되었다고 하나 체계적인 교육과 보급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 외국어학교 교사인 마르텔(Martel)에 의하여 1904년 4월 관립외국어학교에서 체조 과목의 일부로 축구가 채택된 이후부터이다.
1906년 3월 11일에는 궁내부 예식원주사인 현양운(玄暘運) 등 30여 명이 모여 대한체육구락부를 조직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과 삼선평에서 최초의 축구경기를 가졌다. 당시의 축구경기는 선수 인원의 제한없이 양팀 수가 같으면 경기가 성립되었고, 골문도 너비와 높이에 일정한 규격 없이 골키퍼의 키를 표준삼아 적당히 정하였으며, 경기시간도 제한이 없어 어느 팀이건 지쳐 쓰러져 백기를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 1921년 2월 11일부터 4일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26년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축구팀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등 축구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928년 1월에는 숭실학교가 전일본중등학교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5월 20일 조선아식심판협회(朝鮮亞式審判協會)가 발족되어 축구 규칙을 중심으로 지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10월에는 경성과 평양의 경평대항전이 시작되었으며, 아식심판협회를 조선축구협회로 개편하고 일제 압박하에서도 축구보급에 노력하다가 1942년 해산당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며 일제의 강요로 해체되었던 조선축구협회를 재건하였고, 이듬해 6월 국제축구연맹에 정식 가입하였으며, 1948년 대한축구협회로 협회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였으며, 1954년 제5회 스위스월드컵에 아시아대표로 출전하였다. 또한, 1956년 9월에는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전승으로 우승, 한국 축구의 출범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를 제패하였다. 1960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우승함으로써 한국축구는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대회에 출전하여 체코에 6:0, 브라질에 4:0, 아랍공화국에 10:0 등으로 연속 대패하여 심한 진통을 겪었다. 그 뒤 연중무휴로 기술향상에 노력한 결과 1970년에 거행된 제14회 메르데카배쟁탈대회(8월), 제3회 킹스컵대회(11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모두 우승하여 3관왕이 되면서 세계 정상 도전에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1978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공동우승을 하였으며, 1983년 5월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4강에 진입하는 급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1986년 월드컵축구대회에서는 아시아지역대표로 본선에 진출하였으며, 1986년 10월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2:0의 스코어로 쿠웨이트를 꺾고 단독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또한, 1986년 11월에 개최된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카타르를 꺾고 우승하였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월드컵까지 7회연속 월드컵축구대회에 아시아지역대표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이처럼 한국 축구는 현재 아시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1983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프로리그를 출범하여, 2013년 현재 K-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많은 우수한 선수가 유럽 각국과 일본 · 중국에 선수로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으며, 또한 세계 여러 나라의 선수들이 수입되어 K-리그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급속히 발전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과 더불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서울을 비롯한 9개 도시에서 1개월여에 걸쳐 대회가 진행되었으며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