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덴마크왕국(Kingdom of Denmark)이며, 한자어로는 정말(丁抹)이라고 한다. 북유럽의 유틀란트반도와 씨일랜드(Zealand) 등 500여 개의 부속 도서로 구성되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7314㎞에 달한다.
면적은 4만 3094㎢이며, 인구는 558만 1503명(2015년 현재), 수도는 코펜하겐(Copenhagen)이다. 그린란드(Greenland)와 패로(Faroe) 제도는 덴마크의 자치령이다.
종족은 북게르만계 노르만족의 한 분파인 데인족(Dane)이며, 언어는 덴마크어가 공용어이다. 종교는 바이킹시대는 다신교적 신앙형태였으나 9세기경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며, 1936년 복음주의루터교가 국교로 지정되어 전체 국민의 88%가 믿고 있다.
낙농업이 유명하고 식료품 · 철강 · 화학 · 기계공업 등이 발달했으며, 수산업도 성하다. 1975년부터 북해유전을 개발하고 있다.
고도의 복지국가로서 사회보장비가 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2014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342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4655달러이다.
이 나라는 입헌군주제의 내각책임제로서,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79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자유당, 보수당, 사민당, 사회인민당, 덴마크인민당 등이 있다.
1972년 1월에 즉위한 마르그레테 2세(MargretheⅡ) 여왕이 52년 만에 스스로 물러나고, 2024년 1월로부터 여왕의 맏아들 프레데릭 10세(Frederick X)가 즉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덴마크는 9세기경 독립국가를 이루어 13, 14세기에는 북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대국이었으나, 1523년 스웨덴이 독립해 나가고, 1814년 나폴레옹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웨이를 잃으면서 약화되었다.
1864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에 패하여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잃었다. 1448년에 창시된 올덴부르크 왕조가 1849년 6월 절대왕정 폐지 및 의회 신설을 골자로 하는 자유헌법을 제정하면서 입헌군주제로 권력구조가 변하였다.
그 뒤 1901년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여 1915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고, 이어서 의회민주주의의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덴마크는 제1차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제2차세계대전 때는 중립정책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다.
1949년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맹하였고, 1973년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정책을 추구해 왔다. 현재 덴마크는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화에서 안정적인 정치 정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북유럽지역과 유럽 본토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덴마크는 2개의 자치령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그린란드로, 1979년 1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5월 1일 완전 자치를 취득한 후 덴마크 의회에 2명의 대표를 보내고 있다. 또 하나는 패로제도인데, 1948년 4월부터 자치령이 된 후 덴마크 의회에 2명의 대표를 보내고 있다.
대외정책은 중도우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1902년 7월 대한제국 전권대신 유기환(兪箕煥)과 덴마크 전권대신 파블로우(巴禹路厚) 사이에 한정수호통상조약(韓丁修好通商條約) 및 부속통상장정이 조인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마지막 수호조약이었고, 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한 · 일간에 맺어지면서 양국 간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수교했으나, 이때 덴마크 정부의 기술 지원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가설이 이루어지는 등 경제교류에 이바지한 바 있다.
6·25전쟁 중이던 1952년 2월 덴마크는 유엔으로 참전하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Jutlandia號)를 부산항에 정박시켜 의료사업을 지원하였다.
이후 양국은 1959년 3월 31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공사급 외교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1일 덴마크 주일 공사 닐센(Nielsen, T. B.)이 겸임공사로 한국 정부에 신임장을 제정하였고, 같은 날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관을 개설하고 전택보(全澤珤)를 명예영사로 추대하였다. 우리나라는 같은 해 5월 8일 주영 대사가 겸임공사로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양국간의 국교관계가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양국은 다음해인 1960년 10월 21일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키기로 합의하고 같은 해 12월 9일 겸임대사를 교환하였다.
1966년 9월 2일 코펜하겐 주재 명예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1972년 4월 덴마크 주재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덴마크는 1978년 6월 14일 주한 덴마크 상주대사관을 개설하여 초대 주한 상주대사로 필립슨(Philipson, O.)을 임명하였다.
경제 · 기술 협력면에서 양국은 자본 합작 및 기술 제휴를 하였는데, 우선 덴마크의 완구제조업체인 레고사(Lego社)와 한국 우정해운이 1983년 153만 달러를 투자하여 레고코리아(Lego Korea)를 설립하고 1985년 6월부터 공장 가동에 들어갔으며, 덴마크의 BNW엔진사(BNWEngine社)가 1983년 현대중공업과, 1984년 쌍용중공업과 조선 및 선박용 엔진의 현지 생산에 들어가, 1986년에는 국내 건조선박용 엔진의 80%를 공급하였다.
또한, 덴마크의 KVM사와 한국의 코단주식회사도 1982년부터 기술 협력하여 압축보도블로 생산공장을 세워 대량 생산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유니언시멘트사도 덴마크의 FL스미스사와의 기술 협력으로 공장을 세웠다.
이와 같은 기술 협력은 농산물 가공 분야에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국내 최대 규모의 우유 가공공장인 서울우유 파주공장 및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 있는 한정유가공주식회사 등이 1985년에 준공을 보았다.
한편, 덴마크 외무성은 1959년 이래 한국 산업분야의 지도자들을 매년 10명씩 전액 장학금으로 초청하여 농업 · 목축 · 수의 · 의료 · 조립식 주택 · 기계공업 · 핵과학 · 화학공업 · 식물병리 등 67개 분야에 걸쳐 교육훈련을 시켜 왔다.
이와는 별도로 덴마크해외기술원조처는 1969년 한국 5개 도립병원의 의료기자재 구입을 위한 재정차관을 제공하였고, 선박용 전자제품과 조립식 주택 부문 등에 기술 협력을 제공하였다. 두 나라간의 활발한 교류는 사회 · 문화면에서도 긴밀히 유지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스칸디나비안 서울의 메디컬센터(국립의료원)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 근무했던 관계자 250여 명이 한 · 덴마크협회를 결성하고 라우센(Laursen, B.)을 중심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해마다 3, 4회 실시하고 있으며, 덴마크 병원선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1981년 5월 별도로 유틀란디아동지회(Jutlandia-Veterans)를 만들어 ‘한국영화의 밤’이라는 행사를 주최해서 6·25전쟁 참가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덴마크에서는 1980년 5월 덴마크 태권도협회가 조직되어 500여 명의 연수생을 배출했으며, 협회 산하에는 1985년 2월 태권도 클럽이 100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유틀란디아 병원선이 들어오던 1952년 2월 한 · 덴마크협회가 조직되어 덴마크와의 친선사업을 펴왔는데, 회원은 덴마크를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이 가운데서 덴마크에 유학했던 학생들로 조직된 정우회(丁友會)가 1965년 2월에 창립되어 친목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 · 덴마크협회는 1975년 5월부터 ‘덴마크의 날’을 기념하여 한국과 덴마크 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정기적으로 덴마크 사진전도 개최하고 있다.
교민단체로는 1973년 한인회가 창설되어 생활 정보를 나누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덴마크에는 6·25전쟁 고아 6000여 명이 입양되어 갔고, 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며 ‘한 · 덴마크우정의 모임’을 만들어 친선 도모에 적극적이다.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1961년 3월 상속 상호등록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69년 10월 사증면제 협정, 1969년 12월 개발차관 협정, 1977년 10월에 국제운수소득상호면제 협정, 1977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80년 1월에 해운 협정, 1982년 10월에 상사중재 협정, 1988년 6월에 투자보장 협정, 1995년 9월에 항공 협정을 체결하였고, 2006년 11월에는 교육인적개발 양해각서를 교환한 바 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덴마크 수출액은 14억 16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선박 · 승용차 · 합성수지 · 정후판 등이고, 수입액은 9억 9700만 달러로 의약품 · 기타기계류 · 가축육류 · 사료 등이 주종이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14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으며, 2007년 현재 KOTRA를 비록하여 대한항공 · 한국선급협회 · 두산엔진 등이 진출해 있으며, 한국민 교민 192명과 77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73년 7월 17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덴마크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으나 1976년 10월 15일 북한대사관원의 마약 및 술 · 담배 밀수 혐의를 들어 북한 공관원 전원을 추방시킨 바 있다. 그후 1978년 3월 후임 대사의 신임장 제정이 있었으며, 2008년 현재 주 스웨덴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북한의 대 덴마크 수출액은 8만 7000달러로 주종목은 플라스틱 · 섬유 · 기계 · 전기기기이며, 수입액은 8만 9000달러로 주종목은 화학제품 · 묵재 · 금속제품 등이다.
덴마크에는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로 조직된 친북한단체인 조정협회(朝丁協會)가 있으며, 『뉴코리아 New Korea』라는 협회지를 내고 있다. 이밖에도 조선통일 지지 덴마크위원회(DUK)가 있다.
덴마크에서의 한국 연구는 1968년 코펜하겐대학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면서부터 시작되고, 그곳이 중심을 이룬다. 처음은 단지 동아시아학이나 기타 다른 학문 전공 학생들의 개별적인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2년 뒤 한국어학으로 학사에 준하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고, 1975년부터는 동아시아연구소에 한국학과가 설치되면서 석사학위 취득도 가능해졌다. 한편, 코펜하겐의 한 문법학교에서는 한국 지리와 역사에 관한 강좌를 두고 있고, 로스킬데대학에는 1974년 몇 명의 학생들이 한국연구팀을 구성하여 연구하였다.
저술활동으로는 1976년에는 『사회주의국가 조선의 경제개발계획의 사례연구 Socialist Korea:A Case Study in the Strategy of Economic Development』라는 책이 코펜하겐대학에서 출판되었으며, 사회과학연구소에서 「1961년 이후의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사회학연구소에서 「확대되는 한국의 경제산업체계에서 전통적 가족의 서구형가족으로의 이행」이라는 연구작업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연구소에 한국의 언어 · 역사 · 문학 관계의 도서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으나, 코펜하겐에 있는 왕립도서관의 동양학부는 1960년대 이래 한국학 도서를 꾸준히 구입하여 1980년 역사 · 철학 · 종교 · 예술 · 문학 · 정치 · 경제 · 민속 등의 분야에 걸쳐 약 3,000권의 장서와 150종의 학술지를 갖추었다.
한국 유물을 소장하여 이름난 곳은 국립박물관인데, 칼바크(Kalbach) 수집품으로 알려진 도자기를 비롯하여 서화와 다수의 민속품을 소장하고 있다. 1966년 박물관 전시실에 우리나라의 가옥이 세워지고 그 안에 도자기와 서화류를 배치하여 전시회를 가진 바 있다. 1974년 「인간과 신령」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일부로 우리나라의 마을 모습과 4개의 굿장면이 전시되었다. 이 박물관은 또한 왕립도서관과 공동으로 「한국의 인쇄술」을 비롯하여 한국 미술 · 문학 · 도자기 · 가구 · 공예 · 복식 등의 전시회를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서 개최하여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편, 2009년 4월 11일에는 전남 강진군에서 80여일간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 8개국, 9개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고려청자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