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자경(子敬),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생원 하위보(河魏寶)이며, 어머니는 참의 이륜(李倫)의 딸이다. 뒤에 하진보(河晉寶)에게 입양되었다. 최영경(崔永慶)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왜란이 일어나자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곽재우(郭再祐)를 찾아가서 군무를 도와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아우 하염(河恬)이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자 각지로 다니면서 아우 구출을 호소하여 19년 만에 송환시켰다.
1603년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효행으로 추천되어 효경전참봉(孝敬殿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사옹원직장과 내자시주부를 역임하였다.
그 뒤 장수현감이 되어서는 난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부세를 경감하여 생업에 정착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그 치적을 인정받아 백마 한필과 소안(素鞍) 한벌을 하사받았다.
벼슬생활 중 정온(鄭蘊)과 가장 교분이 두터웠는데, 1614년(광해군 6)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온과 더불어 상소하여 간쟁(諫諍)하였다. 1622년 북인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을 단죄하여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여 나라의 위급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중도에서 해산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였고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죽헌문집』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