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좌참찬,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안(仲安)
십주(十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5년(선조 8)
사망 연도
1638년(인조 16)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좌참찬|대사헌|공조판서
관련 사건
류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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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좌참찬, 대사헌,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안(仲安), 호는 십주(十洲). 한진(韓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수경(韓守慶)이고, 아버지는 청천군(淸川君) 한준(韓準)이며, 어머니는 중추부도사(中樞府都事) 최정수(崔貞秀)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4년(선조 37) 생원으로 유릉참봉(裕陵參奉)에 처음 제수되었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에 급제, 설서·사서·정언·문학 등을 지내고, 광해군의 난정을 당하여 외직에 보임되어 재령군수를 지내고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곧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616년 재령군수로 있을 때에 대북파(大北派)의 음모로 일어난 해주옥사(海州獄事)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10여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고,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경기도관찰사로서 난을 평정하고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자하였다.

1628년 형조참판으로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여 류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정2품에 올랐다. 이해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좌참찬·대사헌을 거쳐, 예조·형조·공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평소 독서를 즐겼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으로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기언(記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전고대방(典故大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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