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한원진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성리학의 중심 과제에 두루 미치고 있었고,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실학이 남인 학자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상황에서도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이이(李珥)-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호락논쟁에서는 낙론(洛論)인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한 인물성이론을 대표하였다.
한원진의 심성설의 구조는 우주만물의 생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한원진은 우주에는 양건(陽健)한 기(氣)로서 남성적인 것이 되고 음순(陰順)한 기로서 여성적인 것이 되는 기화(氣化)의 단계와 음양의 기가 모여서 만물의 형체를 이루는 형화(形化)의 단계가 존재하며, 형화를 통해 형성된 형체의 내부에도 기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을 기화, 형화, 형화 속의 기화 등과 같은 삼층의 구조로 파악하고, 이 삼층구조를 심성설에 적용하여 성(性)을 삼층구조로 파악한 것이 성삼층설(性三層說)이다.
한원진은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원진은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한원진은 미발심체(未發心體)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간과는 달리,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한원진의 학문적 관심은 역학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저서로는 『역학답문(易學答問)』·『역학계몽(易學啓蒙)』·『거관록(居觀錄)』·『문왕역석의(文王易釋義)』 등이 있다. 이들 저술을 통해 볼 때, 한원진은 역에 관하여 자연지역(自然之易)·괘획지역(卦劃之易)·문자지역(文字之易) 등이 있다고 하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윤리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성리학적인 역학관의 입장에 서 있다.
저서로는 『남당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임시취고(臨時取考)』·『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莊子辨解)』·『선학통변(禪學通辨)』·『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春秋別傳)』·『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古事便覽)』 등이 있다. 한원진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과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
이들 저술 가운데에서 『경의기문록』과 『주자언론동이고』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의 대부분은 그 판본이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이황(李滉)의 학설과 위배되는 설을 제기했다는 이유에서 어사 김정희(金正喜)의 방화로 회신(灰燼: 불에 타고 남은 끄트러기나 재)되어 희귀본이 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