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기독학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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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1914년 미국 하와이에서 설립, 운영된 기독교계 민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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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4년 미국 하와이에서 설립, 운영된 기독교계 민족학교.
내용

1914년 7월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기숙사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서 이곳으로 와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한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다음해에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으로 3에이커의 토지를 구입, 교실을 건축하였으며, 기숙사도 새로 마련하였다. 1916년 3월 1일에는 기숙사명칭을 한인여자성경학원(韓人女子聖經學院)으로 개칭하였다.

1918년 9월에 한인기독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칭하면서 본격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9월 대한인국민회 소유 엠마 기지와 여자성경학원 기지를 합하여 9에이커의 토지와 환매하였다.

여기에 교사를 조성하고 교명을 한인기독학원으로 확정하였다. 이 학원은 남녀공학제로 학생은 80명 내외였다. 1921년 2월 가이묵기의 학교토지를 1만달러에 매각하고 갈리히 분지에 4,00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재정난으로 1922년 9월에 이르러서야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3만달러의 건축비 결손이 나자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을 결성, 조국에 파견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학생고국방문단의 조직과 파견에 관하여 재미교포들의 반대가 비등하였다.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일본영사의 허락과 증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에 있었으며 임시정부의 독립정책이 절대 자주독립에 있었기 때문에 반대여론이 비등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이 불과 3만달러를 충당하기 위하여 일본영사와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여론이었다. 그러나 학원장 이승만과 학감 민찬호(閔贊鎬)는 이러한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단을 파견하였다.

1923년 5월 30일 민찬호·김영우(金永雨)·김노딕 3명을 인솔자로 삼아 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으로 학생고국방문단을 결성, 링컨호를 타고 고국으로 출항, 같은 해 9월 7일에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민찬호 등 인솔자는 서울청년회 주최의 모금을 위한 각종 모임에 참석하여 한인기독학원의 적자운영을 호소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여 3,600달러의 모금성과를 올렸다. 또한 공립·사립학교의 교장과 교사를 개별적으로 면담하고 지원을 부탁하였다.

한인기독학원은 설립 이후 1928년까지 10년 동안 기숙학교제도를 운영하며 소학교 6년과정까지 교육하였고, 학생수는 90명에 이르렀다. 개교 이후 15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미국 하와이의 민족교육의 일익을 담당한 중심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은 1952년 이 학원을 정리한 18만달러를 기금으로 하여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임정과 이동녕연구』(이현희, 일조각, 1989)
『광복투쟁의 선구자』(이현희, 동방도서, 1990)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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