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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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우
한창우
언론·방송
인물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사장, 대한신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0년
사망 연도
1978년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
관련 사건
여적사건(餘滴事件)|경향신문 필화사건|경향신문 폐간사건|선우종원·한창우 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한창우는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사장, 대한신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1947년 4월 경향신문사 경리부장 겸 비서실장으로 입사했다. 1947년 10월 부사장, 1949년 제2대 사장에 취임해 1961년 6월까지 재임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이 북진했을 때 신문사 최초로 전선판을 평양에서 발행했다. 1961년 6월 경향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61년 8월 장면 측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혁명 사건’의 하나인 ‘선우종원·한창우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 취하로 9월 11일 출감했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경향신문사 사장, 대한신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내용

1910년 5월 15일 충청남도 아산 출생으로, 1933년 수원고등농립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1947년까지 동성상업학교와 동성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47년 4월 경향신문사 경리부장 겸 비서실장으로 입사해 곧바로 영업국장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부사장, 1949년 9월 29일 제2대 사장에 취임해 1961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1950년 4월 14일 중앙선거위원회에서 선정한 서울시 선거위원이 되었고, 5월 노기남(盧基南) 주교와 함께 한국천주교 사절단으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중 국군이 북진하였을 때 신문사 최초로 전선판(前線版)을 평양에서 발행하였으며, 1·4후퇴 때는 대구에서 이동전시판(移動戰時版)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51년 10월 대한신문협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53년 신문사의 전소(全燒)된 사옥과 시설을 복구해 8월 서울로 복귀시켰고, 1954년 신형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신문사 시설을 확충해 『경향신문』 축쇄판을 발행하였다. 1958년 대한소년단(보이스카우트) 부총재가 되었다.

1959년 2월 4일자 조간의 ‘여적(餘滴)’란에 “현 한국정세는 공명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전조를 보이고 있다.”는 등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내용을 게재한, ‘경향신문 필화사건’(이른바, ‘ 여적필화사건’)이 일어나 2월 28일 필자 주요한(朱耀翰)과 함께 정식 기소되었다. 이로 인해 그해 4월 30일 군정법령 제88호로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가, 6월 26일 서울고등법원이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다시 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국무회의를 통해 다시 무기정간 처분이 내려졌다. 결국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4월 26일 대법원이 『경향신문』에 대한 행정처분 집행 정지 결정을 내림으로써, 4월 27일자로 복간되었다.

평소 스포츠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60년 6월 15일 대한사격협회 회장, 7월 14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9월 23일 외무부 외교자문위원회 위원, 12월 7일 문교부 산하 중앙교육위원회 관선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61년 3월 경향신문사에서 1,400여 쪽에 달하는 『체육대사전』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기도 하였으며, 6월 경향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8월 주로 장면(張勉) 측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 반혁명사건’의 하나인 ‘선우종원(鮮宇宗源) · 한창우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 취하로 9월 11일 출감하였다. 그와 장면과 수원고등농립학교 선후배 사이이자 사돈지간이었다. 그해 12월 유원실업(裕原實業)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78년 12월 9일 69세로 사망하였으며, 사후 13주기인 1991년 12월 아들 한기복(韓基復)에 의해 추모집 『소우(小愚)』가 간행되었다. ‘소우’라는 제목은 경향신문사 편집국 사원들의 친목회인 소우회(小愚會)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문헌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한창우, 가톨릭출판사, 1967)
『전국주요기업체명감』(대한상공회의소, 1956)
『대한민국건국10년지』(대한민국건국10년지간행회, 1956)
『대한연감』(대한연감사, 1955)
『경향신문』(1995.4.19)
『경향신문』(1959.2.4)
『부산일보』(1952.8.12)
『한성일보』(1950.4.14)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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