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경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광한단을 조직하였고, 대한통의부 법무위원장, 정의부 중앙위원장, 국민부 법무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하죽(河竹)
이칭
병근(炳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6년(고종 23)
사망 연도
1941년
출생지
평안북도 박천
정의
일제강점기 때, 광한단을 조직하였고, 대한통의부 법무위원장, 정의부 중앙위원장, 국민부 법무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본명은 현병근(玄炳瑾). 호는 하죽(河竹). 평안북도 박천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 후 만주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한족회(韓族會)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여, 1922년 통의부(統義府)가 발족될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갔다.

1922년 8월 한족회·광복군총영·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서로군정서·광한단·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등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봉천성 환인현(奉天省桓仁縣)에 모여 출범시킨 대한통의부의 법무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 11월 길림(吉林)에서 양기탁(梁起鐸)·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중앙위원회에 선임되었으며, 그 뒤 중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뒤 정의부·신민부(新民府)·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등의 3부 통합이 실패하자, 1929년 4월 신안둔(新安屯)에서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될 때 법무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30년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국민부를 전복시키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충칭(重慶)으로 탈출하였다. 1936년 김성숙(金星淑) 등과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을 조직하였고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고 주석에 취임하였다.

그 뒤 치장(綦江)에서 열린 회의에서 산재한 여러 개의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이동녕(李東寧)의 지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집결시키는데 합의하여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90)
『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박영석, 일조각, 1988)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박영석, 일조각, 1982)
『독립운동사연구』(박성수, 창작과비평사, 1980)
『독립운동사』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공산주의운동사』1∼5(김준엽·김창순 편,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6∼1970)
『조선독립운동』 Ⅰ·Ⅱ(김정명 편, 원서방, 1967)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社會運動の狀況』(日本內務省, 1933)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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