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휘(玄暉, 879~941)는 법명이며, (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南原) 출신이다. 아버지 이덕순(李德順)은 노자와 주역에 밝았으며, 어머니는 부씨(傅氏)이다.
현휘는 영동군 남쪽의 영각산사(靈覺山寺) 심광(深光)의 문하로 출가하였는데, 심광이 낭혜무염(朗慧無染)의 제자이므로 성주산문(聖住山門)에 속하게 되었다. 현휘는 898년(효공왕 2)에 해인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906년 당으로 유학을 가서 구봉도건(九峰道乾)의 문하에서 수행하고 법맥을 이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중국 각지를 다니다가 924년(태조 7)에 귀국하였다. 태조가 현휘에게 국사의 대우를 하였고, 만년에는 충주 정토사(淨土寺)에 머물렀다. 941년에 입적하였으며, 시호는 법경 대사(法鏡大師), 탑호는 자등(慈燈)이다.
법경대사탑비(法鏡大師塔碑) 음기(陰記)를 통해 홍림대덕(弘琳大德), 경부대통(景孚大統), 훈예화상(訓刈和尙) 등 문하의 제자가 확인된다. 한편, 이 탑비에 유권열(劉權說) 등 유씨 40여명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탑비에는 원주, 전좌, 사, 직세, 도유나 등 선종의 독자적인 직제인 삼강직(三綱職)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선문의 운영 형태와 제도를 알 수 있다.
현휘는 석두희천(石頭希遷)-약산유엄(藥山惟儼)-도오원지(道吾圓智)-석상경제(石霜慶諸)-구봉도건(九峰道虔)의 법맥을 이었으므로 석두계 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낭혜무염이 마조도일-마곡보철의 법맥이라는 마조계의 선을 계승한 것과 달리, 석두계의 선을 수용한 현휘를 통해 신라 말 이후 선 사상의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불성이 드러난 것(作用卽性)'으로 본 마조도일(馬祖道一)은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 '수행에 의해 미혹한 마음을 부처의 마음으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일상 그대로의 마음이 곧 도(平常心是道)'라 주장했다. 이와 같은 마조도일의 주장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이상적 상태로 간주하는 평상무사(平常無事)의 사상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마조도일이 표방한 선의 이념이 절대화되고 교조화되면서, 당의 선종계에서는 수행을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폐단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마조도일 스스로도 경계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은 주로 청원 계통의 석두희천(石頭希遷)이 마조계와 다른 선 사상을 표방하면서 이루어졌다. 석두 계통의 선사들은 법성(法性), 불성(佛性) 등의 본래성과 모든 일상의 행위인 현실태(現實態)의 작용을 마음 아래에 무매개적으로 등치한 마조 선을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현휘가 이은 석두계는 현실태와는 다른 차원의 본래성을 새롭게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