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홍일민(洪逸民)이고, 아버지는 진사 홍영필(洪永弼)이며, 어머니는 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1597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가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시강원(侍講院)의 설서·사서를 거쳐 헌납이 되어 권신을 비난하다가 함경도도사로 밀려났다.
외직으로 3년을 지낸 뒤 1603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그 후 죽주부사와 수찬·필선·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통정계에 승진, 정주목사·의주부윤이 되어 서로(西路)의 잔폐를 구제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 후 동부승지로 재직 중 부모를 모시기 위해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청했으며, 그 치적이 나타나 표창을 받고 가선계에 올랐다. 이 때 광해군이 금나라와 수호관계를 맺자, 급고사(急告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반발을 무마시키고 돌아왔다.
한편, 금나라에서 누차 조선을 위협하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단연 배금(排金)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에는 경기관찰사가 되어 경기 부근에서 일어난 반란의 기운을 진정시켰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며 따랐다. 박엽(朴燁)·정준(鄭遵) 등이 서쪽 황해도와 평안도의 관로로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을 침탈했으나, 그에 대해서는 감히 소홀히 대하지 못하였다. 또한 중국에 갔을 때에는 학사들이 그를 장덕군자(長德君子)라고도 칭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났는데, 문장은 양한(兩漢)을 주로 하고, 시는 성당(盛唐)을 주로 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또 그 아들의 공로로 찬성이 가증(加贈)되었다. 저서로 『해봉집』 3권 3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