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지 ( )

경주 황룡사지 중 금당지
경주 황룡사지 중 금당지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일의 중심 가람이었던 황룡사의 사찰터. 사적.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일의 중심 가람이었던 황룡사의 사찰터. 사적.
개설

경주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는 황룡사지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이고 황룡사는, 규모나 사격(寺格)이 신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터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회좌석이 있는 곳으로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 땅이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보여주고 있다.

황룡사는 늪지를 메우고 중문·목탑·금당·강당을 남북으로 길게 배치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381,048㎡.

역사적 변천

황룡사는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진흥왕 14)에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이와 같이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주위에 돌담장을 두르고 경역(境域)을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뒤 574년에 5m가 넘는 주존불(主尊佛)을 비롯해서 금동삼존불(金銅三尊佛)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金堂)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에 세웠다.

선덕여왕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고승 자장(慈藏)의 권유로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 이때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 전체 80m에 달하는 구층목탑(九層木塔)을 완성시켰다.

이와 같이 553년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645년 목탑이 완성될 때까지 4대왕 93년간에 걸쳐 국가적으로 조성된 대사찰이었으며, 역대 임금이 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은 신라 최고의 국가사찰로 유지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에는 신라삼보(新羅三寶) 가운데 둘이 있었는데, 금당에 모셨던 삼존불 중 주존불인 장륙존상(丈六尊像)과 80m 높이의 구층목탑이 그것이다.

고려조에 있어서도 이 절은 높은 숭앙과 보호를 받아왔다. 현종 때인 1012년에는 경주에 남아 있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목으로 구층탑을 수리하기도 하였고, 그 뒤 1105년에는 예종이 상서(尙書) 김한충(金漢忠)을 보내어 수리한 황룡사의 낙성식에 참석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황룡사는 1238년(고종 25) 몽고병의 침입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오늘날까지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

내용

황룡사지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 발굴조사되었다. 문화재연구소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결성되고, 1976년 6월부터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1983년 12월까지 8년 동안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원래의 황룡사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로 8만928㎡였으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중문(中門)·탑(塔)·금당(金堂)·강당(講堂)이 남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1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를 기본으로 하고, 탑의 전방으로 좌우에 대칭되게 건물을 세워 종루(鐘樓)·경루(經樓)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특이하게도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을 나란히 세웠음이 밝혀졌는데, 이 건물 역시 금당과 같은 성격으로 보인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回廊)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이처럼 전혀 새로운 형태였음이 밝혀져, 지금까지 막연히 추정해왔던 것을 바로잡게 되었다. 즉,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 1930년에 조사 발표되었던 내용은 회랑의 형태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장방형으로 모두 서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고, 그 내부에 탑과 금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방형에 가까운 회랑 내부에 삼금당과 종루와 경루가 있어 이것이 신라의 독특한 가람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 밖에도 발굴조사 결과 이 절이 그 규모에서 동양최대의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층탑은 무려 80m나 되는 높이를 가진 대탑으로 동양 최고의 목조건물이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무려 4만여점에 달하며, 이 중 각 시대에 걸쳐 만들어져 사용된 와전류(瓦塼類) 가운데 특히 측면에 용(龍)을 새긴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은 지금까지 출토된 예가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이다. 금속류로서는 금동제불상·풍탁(風鐸)·금동제귀걸이·청동거울 등이 수습되었으며, 이 중 금동불상 1점은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서 높이 10㎝에 지나지 않으나 조각 솜씨가 우수하며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하다.

목탑지의 심초석(心礎石) 아래에서 수습된 작은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 높이 182㎝, 최대너비 105㎝ 되는 대형의 치미(鴟尾: 매 머리모양의 장식)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특징

동양 최대의 절터이자, 동양 최대의 치미가 발견된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신라에 있었다는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황룡사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고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강당에 친히 와서 고승이 모여서 마련하는 백고좌강회에 참석하여 불보살의 도움을 빌었다. 즉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주요하고 규모가 큰 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가람이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황룡사복원 국제학술대회논문집』(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 2001)
『황룡사의 조영과 왕권』(양정석, 서경문화사, 2004)
『황룡사의 종합적 고찰』(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편집부,『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Vol.22, 2001)
『황룡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1·2(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4)
「경주 황룡사지에 대한 유구조사와 문헌자료와의 비교검토」(김동현, 『불교미술』10, 1991)
「황룡사지발굴과 삼국유사의 기록」(김정기,『신라문화』1, 1980)
「신라황룡사구층목탑 찰주본기와 그 사리구」(황수영,『동양학』3,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3)
집필자
조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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