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창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후창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후창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북동부에 있는 군.
정의
평안북도 북동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함경남도 삼수군, 서쪽은 자성군, 남쪽은 강계군과 함경남도 장진군에 접하고,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만주의 장백현과 마주하고 있다.

동경 126°43′∼127°40′, 북위41°00′∼41°45′에 위치하며, 면적 2,428.17㎢, 인구 4만 8090명(1943년 현재)이다. 5개 면 18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후창면 군내동이다.

자연환경

낭림산맥의 자강고원(慈江高原)의 동부에 해당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높이 1,000m 이상의 고지대이며, 남동부에는 높고 험한 산들이 연이어 있고, 북쪽으로는 완경사를 이루어 북서부는 평탄면이 이루어져 있다.

남동부에는 충천봉(衝天峰, 1,463m)·남사산(南社山, 1,787m)·희색봉(稀塞峰, 2,185m)·사랑봉(舍廊峰, 1,787m), 남서부에 백삼봉(白三峰, 1,556m)·사덕산(寺德山, 1,355m) 등이 있고, 중앙에도 동림산(東林山, 1,523m)·봉운산(奉云山, 1,474m) 등이 있어 거의 전역이 산악 지대이다.

후주천(厚州川)이 군의 남서부 동흥면 남단에서 발원, 북동류하여 압록강에 유입하며, 후창강이 북부를 북류하여 역시 압록강에 유입하고, 압록강은 이들 여러 지류들을 합치면서 군의 북부 경계를 이루며 북서류한다. 또한, 자성강(慈城江) 상류가 남서부를 북류하며, 이들 하천 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기후는 우리 나라의 최북단에 가깝고 고원 지대인 관계로 기온의 연교차가 4℃ 이상이 되는 대표적인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며, 우리 나라 한극(寒極)의 일부가 된다. 연평균 기온 3.7℃, 1월 평균 기온 -18.8℃, 8월 평균 기온 22.2℃, 연 강수량 950㎜이다. 서리는 9월 20일경에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5월 12일경에 끝난다.

역사

[고 대]

구석기 시대의 유물·유적뿐 아니라 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유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접한 자성군 장토면·장성동·토성동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과 청동기 시대 유물 및 주거지가 발견되므로 이곳에도 일찍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과 한사군을 거쳐 고구려의 세력이 차차 강성해짐에 따라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어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발해 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발해가 멸망한 뒤 발해 유민 열만화(烈萬華)가 만주의 동가강 일대와 압록강 유역의 초산·벽동·위원·강계·자성·후창 지방을 중심으로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거란에 저항하였으나, 그도 얼마 가지 못하여 986년(성종 5)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이후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거란 및 여진족이 분산하여 거주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북진정책을 써서 성종 때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여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부 지역과 평안남도 전역을 회복하였으며, 1044년(정종 10)에는 압록강구로부터 위원·흥화·삭주·운주·희천·영변·영원·정융·맹주를 거쳐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으나, 장성 이북의 벽동·창성·초산·위원·강계·후창·자성 일대는 회복되지 않았다.

14세기 중엽에도 공민왕이 북진을 계속하여 1361년(공민왕 10) 독로강(禿魯江 : 江界)에 만호(萬戶)를 설치함에 따라 압록강 중류 연안인 창성·벽동·초산 등이 수복되었지만, 자성·후창 지역은 여전히 야인의 활동 무대로 남아 있었다.

[조 선]

태종 때 압록강 이남 지역이 모두 회복되고 1413년(태종 13) 10월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갑산군(甲山郡)으로 승격되면서 갑산군은 갑산뿐 아니라 여연(閭延)·후주(厚州)·무창(茂昌) 등의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416년 7월갑산군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이 설치되자, 후주·무창은 여연군에 이속되고 상무로보(上無路堡)라 하였다.

1436년(세종 18) 만호가 두어졌으며, 1440년여연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분리되어 무창현(茂昌縣)으로 되었다가 2년 뒤에 무창군으로 승격되니, 여연·자성(慈城)·우예(虞芮) 등과 더불어 4군(郡)이라 하였다.

그러나 4군은 모두 산간벽지인 데다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방위나 주민 보호가 대단히 어려웠으므로 문종 때부터 철폐론이 일어나다가 1455년(세조 1)여연·무창·우예군이 폐지되고 4년 뒤에는 자성군이 폐지되었다. 이 4군의 폐지는 영토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방어선의 후퇴와 행정상의 변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 뒤 1664년(현종 5)후주진(厚州鎭)이 설치되고, 1683년(숙종 9)에는 무창진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1813년(순조 13)과 1822년에 각각 무창진과 후주진이 부(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869년(고종 6) 10월에 이르러 함경도 관하에 있던 후주부가 다시 평안도로 이속됨과 동시에 무창부와 후주부를 합쳐 후창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의 행정구역은 하산(河山)·진목(眞木)·부평(富坪)·칠평(七坪)·후평(厚坪)·부성(富盛)·무창(茂昌)·연성(蓮城)·쌍남(雙南) 등 9개 면이었고, 군치(郡治)는 하산면에 있었으며, 호구는 1,494호, 5,461명이었다.

[근 대]

1895년 5월 지방 관제가 23부제(府制)로 개편되자 이 군은 강계부에 속하였으며, 다음해에 다시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평안북도에 속하였다.

1907년 5월 현재 읍·칠평·부성·무창·연성·하산·진목·부남 등의 8개 면으로 이루어져 호수는 1,152호, 4,978명이었다. 1943년 일제 말기의 호수 통계에 의하면, 후창·동신·동흥·남신·칠평 등 5개 면에 호수 8,629호, 인구 4만 6072명(남자 2만 5704명, 여자 2만 368명)으로 급격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압록강에 면하여 있고 지형이 험준하여 독립단 활동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일찍이 한말에 이곳에서 벌어진 의병 활동은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특기할 만하다.

당시 의병장 차도선(車道善) 휘하에 있다가 갑산에서 흩어진 양혁진(梁嚇鎭)과 한영사(韓永俟) 등이 장수에서 다시 집결한 뒤 1908년 4월 6일 후창에 진주하여 약 1개월에 걸쳐 일본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면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벌이려다 일본 수비대의 감시와 군수 계응규(桂膺奎)의 발포 위협으로 실패하였으나, 그 뒤 1년 반이 지난 1920년 9월 1일 북청 출신의 독립단원 이덕창(李德昌)이 계응규를 사살하였다.

이덕창은 그로부터 얼마 뒤 붙잡혀 평양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또한, 1920년 8월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가 실시되자 초대 군감에 임명된 김정태(金珽泰)는 이유필(李裕弼)과 1920년에 항일청년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계응규의 암살을 지휘한 바 있고, 광복군·국민부(國民府)·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등에 가담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한 장승언(張承彦) 등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유물·유적

성지(城址)로는 동흥면 고읍동에 옹성(甕城)이라 부르는 길이 2.3㎞의 석축 성곽을 비롯, 압록강 연안을 따라 동신면 두지동에 둘레 6.5㎞의 방형석성, 후창면 금창동에 길이 4.72㎞, 너비 1.8m, 높이 1.3m의 석성, 동신면 무창동에 3.27㎞에 달하는 석성 등이 분포되어 있으나,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특히, 동흥면 고읍동후주천과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축성된 후주성은 현재 원형은 없어지고 북서쪽 성곽만이 남아 있으나, 압록강 건너 장백현이 한눈에 보이는 요새이다.

고분군으로는 동신면 두지동의 석총 6기를 비롯하여 후창면 금창동 등지에 지름 2.5∼1.9m에 이르는 석총들이 분포되어 있다.

누정으로는 오가산(五佳山, 1,198m)의 망백정(望白亭), 후창면의 망화루(望華樓), 동흥면 고읍동의 팔경대(八景臺)가 있으며, 사찰로는 후창면에서 약 4㎞ 지점의 보타산(普陀山, 일명 天摩山)에 있는 관음사(觀音寺)가 유일한 것인데, 이 절은 1888년(고종 25)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말사로서 창건된 것이다.

교육·문화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산간벽지인 관계로 서당 14개소가 있었을 뿐이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35년(헌종 1)에 남신면 부흥동에 2년제 사립 신흥학교(新興學校)가 설립되었으며, 1911년에는 동흥면 나죽동에 나죽공립보통학교, 1927년에는 후창면 군내동에 후창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그 뒤 1920년에 칠평면 중흥동에 칠평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으며, 교통이 불편한 산간에는 교사 한 사람이 보통 3학년 정도까지의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간이학교가 곳곳에 있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6년에 후창면 군내동에 2년제 후창공립농공보수학교(厚昌公立農工補修學校)가 설립되었다. 종교 상황을 살펴보면, 불교 사찰은 천마산에 관음사·대승암(大乘庵) 등이 있으며, 천도교는 1880년(고종 17) 이군하(李君河)가 포교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는 1909년 칠평면에 칠평교회가 세워진 뒤 크게 발전하여 1935년까지 10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특히 선교사 감부열(甘富悅)이 세운 남신면의 화평교회(和坪敎會)가 유명하였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풀무요〉와 〈신랑요〉 등이 있다. 〈풀무요〉는 “풀무 달무/서울 갔다/닭 한 마리 얻어다가/쌀독에 넣었다가/팥독에 넣었다가/우리 애기 생일날/맛있게 지저서/너도 먹구 나도 먹구/푸를풀떡 풀무야.”와 같이, 〈신랑요〉는 “새스방태기 망태기/헌벙거디 날라리.”와 같이 부른다.

〈풀무요〉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부터 네댓 살 된 아이의 양팔을 잡고 앞에 세워서 좌우로 갸우뚱거리며 이 노래를 부른다. 어린아이는 노래의 말귀와 음률에 따라서 좌우의 발을 올렸다 내렸다 한다.

이러한 동작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도 되지만, 어린아이의 다리 힘을 길러 주며 걸음걸이를 하는 예비 운동도 된다. 이 노래는 어린아이의 노래가 아니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다. 〈신랑요〉는 조혼한 어린 신랑을 놀릴 때 부르는 노래라 음악성은 별로 없다.

산업·교통

대부분의 지역이 산악 지대로 평지가 적고 토지가 비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후도 한랭하여 농업에 불리하다. 다만, 화전 경작이 가능하여 전국에서 화전민이 가장 많다.

조·콩·옥수수·수수·감자 등이 주로 생산되며, 양잠·양봉·축우도 행하여진다. 임업은 군 전역이 거의 원시림으로 덮여 홍송·삼송·낙엽송 등 침엽수가 울창하여 압록강재의 보급원이 되어 매우 활발하다.

특히, 강계군과 경계의 직령(直嶺)·남사수(南社水) 삼림은 미림(美林)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벌채된 목재는 남사수의 삼림철도를 제외하면 뗏목으로 운반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산삼이 가끔 산출되며, 특산물로 목기(木器)와 담수어인 청사리가 있다. 광업은 남신면에 동을 채굴하는 동점광산(銅店鑛山)이 있다. 상업 활동은 교통이 불편하고 기후가 한랭하여 발달하지 못하였다.

한편, 시장으로는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에는 군내에 시장이 없었으며, 그 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에 후창면 군내동에 읍내장이 1·6일에 열렸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남신면에 우리 나라 최대의 동광산이 생기고 금광과 흑연 광산이 생기면서 교통이 발달하고, 풍부한 삼림을 벌채하여 각종 가구를 만들게 되면서 상업이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동흥면 나죽동에 1·6일, 고읍동에 3·8일, 칠평면 중흥동에 2·7일, 남신면 가산동에 5·10일에 5일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들 시장에서 농민들은 각종 농산물 및 임산물·산채·함지 등을 팔고 포목·일용 잡화 등을 구입하였으며, 시장에 집산된 곡물과 임산물은 각 지방으로 반출되었다.

교통은 압록강 남안을 따라 국경 도로가 있어 북쪽으로는 중강진, 동쪽으로는 함경남도 혜산진과 통하며, 후창강구에서 1등도로가 Y자형으로 갈라져 남쪽으로 후창을 지나 장진으로 통하고, 칠평면 소북동에서 강계로 통하는 2등도로가 연결되며, 또한 북쪽으로는 자성과 통한다.

읍·면

[남신면南新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3.97㎢, 인구 1만 24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화동이다. 사덕산(寺德山, 1,355m)·고덕산(高德山, 1,147m)·오봉산(五峰山, 1,081m)·유동산(楡洞山, 1,460m)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연이어 있어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자성강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며 유역에 소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수수·메밀·조·콩·옥수수 등이 생산되고, 감자·녹두·땅콩 등도 약간 생산된다. 삼림은 전나무·잣나무·낙엽송·적목·가문비나무·엄나무·피나무·참나무·박달나무·도토리나무 등이 대수해(大樹海)를 이루어 임업이 활발하며, 잣·가래·두릅·고사리·버섯 등도 산출된다.

교통은 후창과 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어 편리하다. 부흥동에 있는 종유굴인 금강굴(金剛窟)과 부흥계곡(富興溪谷)은 명승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유화(裕和)·가산(佳山)·부흥(富興)·만흥(晩興) 등 4개 동이 있다.

[동신면東新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57.20㎢, 인구 5,450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포삼동이다. 고원 지대로 1,000m 이상의 높고 험한 산들이 많다. 면의 남쪽에 서석산(西石山, 1,304m)·동림산, 북쪽에 독산(獨山, 1,175m), 중앙에 모종산(莫從山, 1,168m)·독호암산(獨弧巖山, 1,001m) 등이 솟아 있다.

작은 하천들이 이들 산지 사이를 북류하여 압록강에 합류하고, 압록강이 북부 경계를 이루면서 북서류하며 유역에 소규모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콩·옥수수·메밀 등이 생산된다. 산에는 전나무·잣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의 침엽수림과 참나무·두릅나무·물푸레나무·가래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우거져 임업이 활발하며, 더덕·도라지·고비·돌배·머루·산삼 등도 산출된다. 교통은 압록강 국경 도로만 북부를 지나고 있어 불편하다. 포삼(葡三)·두지(杜芝)·무창(茂昌) 등 3개 동이 있다.

[동흥면東興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824.49㎢, 인구 1만 22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읍동이다. 대부분 지역이 1,000m 이상의 고원 지대로 봉화산(烽火山, 1,088m)·장막산(獐幕山, 1,210m)·교곡산(橋谷山, 1,112m)·성사산(城社山, 1,157m)·전지산(田地山, 1,623)·남사산·황야봉(黃野峰, 1,874m)·막간산(幕間山, 1,484m) 등 높은 산들이 연이어 솟아 있다. 후주천이 중앙을 북동류하여 압록강에 유입하며, 압록강이 북부 경계를 이루며 서류하고 있다.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약간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옥수수·메밀·콩 등이 생산된다. 삼림이 울창하여 임업이 활발하며, 버섯·고사리·머루·산삼·당귀·오미자·대황 등도 산출된다. 광업으로는 나죽동에 금광인 상덕광산(上德鑛山)이 있다.

교통은 압록강 국경 도로가 북부를 지나며 칠평면과 연결되는 도로가 중앙을 동서로 지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물·유적으로는 고읍동에 후주성지(厚州城址)와 팔경대가 있다. 고읍(古邑)·나죽(羅竹)·쌍남(雙南) 등 3개 동이 있다.

[칠평면 七坪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4.04㎢, 인구 7,87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중흥동이다. 소북산(小北山, 1,445m)·사건봉(仕建峰, 1,499m)·길중봉(吉仲峰, 1,394m)·사랑봉 등 높은 산들이 연이어 있어 면의 대부분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봉에서 발원한 자성강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콩·옥수수·메밀·조 등이 생산된다. 산에는 낙엽송·전나무·가문비나무·잣나무·향나무 등의 침엽수림과 들메나무·참나무·물푸레나무·황철나무 등이 대수해를 이루어 목재생산이 많아 산림철도가 건설되었으며, 신탄·고사리·버섯·산삼·당귀 등도 산출된다.

교통은 후창과 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며, 여기에 강계로 통하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대흥동에는 위장병과 종기에 효험이 있다는 칠평약수가 있다. 중흥(中興)·대흥(大興)·소북(小北) 등 3개 동이 있다.

[후창면厚昌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08.47㎢, 인구 1만 242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군내동이다. 자강고원과 장진고원(長津高原)이 인접한 고원의 정상부에 해당되어 높이 1,000m 이상의 고지대로서 높고 험한 산들이 많다.

성사산·성대봉(城臺峰, 1,441m)·봉운산·죽갑산(竹甲山, 1,085m)·향내봉(香內峰, 1,365m)·갈전산(葛田山, 998m)·소독산(小獨山, 1,016m)·회양산(檜陽山, 963m) 등 고산들이 연이어 솟아 있다.

후창강이 면의 남부 국망봉(國望峰, 1,549m)에서 발원하여 중앙을 북동류하며 압록강에 유입하고, 하천 유역에는 약간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콩·옥수수·메밀 등이 생산된다. 산에는 가문비나무·전나무·잣나무·낙엽송·적목 등 침엽수림이 우거져 임업이 활발하며, 산과실·고사리·더덕 등도 산출된다.

교통은 압록강 국경 도로와 연결되어 자성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북부를 지나며, 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남부 중앙을 지나고 있어 편리한 편이다.

또한, 압록강은 수로로서 목재 반출에 이용된다. 유물·유적으로는 오가산에 망백정, 보타산에 관음사 등이 있다. 군내(郡內)·회(檜)·금창(金昌)·부흥(富興)·장흥(章興) 등 5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49년 1월자강도가 신설되면서 평안북도에서 분리되어 자강도에 편입되고, 1954년 10월양강도가 신설되자 다시 양강도에 편입되었다. 이때 용산리가 분리되어 화평군에 편입되었다.

1961년 12월 후창읍이 원탄리로, 포삼리가 후창읍으로 개칭되었다. 1967년 10월 노탄리가 노탄노동자구로, 고읍리가 고읍노동자구로, 남사리가 남사노동자구로 각각 개칭되었고, 1988년 8월김형직군(金亨稷郡)으로 개칭되었다.→김형직군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창원군읍지』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후창군지』(후창군지편찬위원회會, 1980)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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