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개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남도 개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남도 북단에 있는 군.
정의
평안남도 북단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알일령(戞日嶺)을 경계로 덕천군과 접하고, 서쪽은 안주군, 남쪽은 순천군, 북쪽은 청천강을 경계로 평안북도 영변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48′∼126°10′, 북위 39°30′∼39°50′에 위치하며, 면적 679.19㎢, 인구 약 6만 7000명(1937년 현재)이다. 관할구역은 1개 읍과 5개 면 55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개천읍 군우리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군의 동북부에 묘향산맥의 여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월봉산(月峰山, 1,033m).대림산(大林山, 1,863m).알일령(677m).갈인봉(葛仁峰, 1,088m).입봉(笠峰, 880m).고사산(姑射山, 1,011m) 등의 산이 솟아 있어 대체로 산악 지대를 이룬다.

서남부 일대에 분탄(犇灘)·개천강·청천강·대동강의 지류가 흘러 유역에 넓은 평야가 발달, 준평원의 지형을 이룬다. 알일령 밑의 조양면에는 부연(釜淵)이라는 소(沼)가 있다.

내륙 지방에 위치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나타내며 한서의 차이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8.5℃, 1월 평균 기온 ·11℃, 8월 평균 기온 24.5℃이며, 연 강수량 1,148㎜이다.

역사

[고 대]

청천강 중류 묵방리에 탁자식·기반식 고인돌 및 기단식 적석총 등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에 청동기시대 이래로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며, 적석총의 존재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612년(영양왕 13) 고구려에 수나라 대군이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침략해 왔을 때,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 휘하의 제3군이 개천 땅 건지산(乾芝山)에 잠복하였다가 적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고 북으로 패퇴할 때 적군을 공격하여 살수대첩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발해의 남해부 외곽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 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건국한 후 서북 각지에 성진(城鎭)을 설치할 때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하여 북방의 군사 요지로 삼았다.

989년(성종 8)에 서북면(西北面)에 병마사를 파견하게 되자 그 관할하의 성진이 되었다. 성종 이후 거란의 침입이 잦아지자 1018년(현종 9)안수진을 조양진(朝陽鎭)으로 고쳐 부르게 하고 연주(蓮州)를 주둔하게 하였다.

1174년(명종 4)에 무신 정권에 반대하여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켜 연주에 입거하자 관군이 이를 토벌하고 축출한 바 있다. 그 뒤 1215년(고종 2) 거란의 침입 때 전공이 컸다 하여 연주방어사를 다시 두었다. 이듬해 거란군이 개천 땅에 재침략했으나 고려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1217년 고을 이름을 익주(翼州)로 고쳐 그 격을 높였다.

고종 때에 몽고군이 계속 고려에 침입해 오자 서북면병마사 영기관(營記官) 최탄(崔坦)이 조국을 배반하고 서북면 땅을 거두어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평양에 동녕부를 두고 그 땅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가 철폐될 때까지 원의 지배하에 놓여졌다. 1359년(공민왕 8)에 만주로부터 홍건적이 침입하여 오자 2년 뒤에 개천과 안주 땅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무렵 고을 이름을 개주(价州)로 고쳤다.

[조 선]

조선 시대 초기에는 서북면에 속한 고을이었으나 1413년(태종 13)서북면을 평안도로 고치고, 관찰사가 평양에 주류하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바뀔 때에 평안동도(平安東道) 소속의 군으로 확정, 개천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세종대에는 성천도호부 소속 군으로 변경되었다. 1466년(세조 12) 진관제(鎭管制)가 실시될 때 개천은 성천진의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지방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평양부 관할 하의 한 군으로 되었다.

[근 대]

1895년 8도제가 폐지되면서 평양부 소속 27군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5등군으로 확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3년 내남면을 떼어 순천군에 속하게 하고, 1925년 조양면에서 개천면으로 군청 소재지를 옮겼다.

1935년 순천군 소속의 봉명면을 편입시켜 외동면과 병합하여 봉동면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1941년 10월 개천면이 개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개 읍 5개 면 55개 이로 편제되었다.

유물·유적

선사 시대 유적으로 묵방리에는 1기의 탁자식 고인돌과 함께 30여 기의 기반식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중서면 용흥리에서도 동검·돌도끼 등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묵방리와 봉동면 봉창리에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이 있으며, 특히 봉창리에는 적석총 30기와 석실분 10여 기가 조사되었다.

이 군은 원래 고려 시대 조양진(처음에는 안수진)의 후신인데, 조양진 고성은 개천읍 신송리에 있다. 이 성은 토성으로서 주위가 1만 5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지금은 대부분이 허물어졌다.

그 밖에도 이 군에는 고사산성이 있다. 고사산성은 주위가 3만 6000여 척에 이르는 석성이었는데,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편, 남으로 순천군과의 군계 요지에 진보(鎭堡)로 금성진(金城鎭)이 설치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 군의 사찰로는 봉동면 봉하리에 있는 관음사(觀音寺)와 북면 인흥리의 내원암(內院庵) 등이 있으나 그 규모는 작다. 읍내의 숭화재(崇華齋)는 한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충주를 점령하는 등 큰 활약을 하다가 쫓기게 되어 평안도의 유생·민인들과 재기를 꾀하기 위하여 이동해 왔을 때, 평안도의 유생 대표 백삼룡(白三龍)·조병준(趙秉準)·신우현(申禹鉉)·장원섭(張元燮) 등과 이곳에 총본영을 두고 항일 의병 투쟁을 모의한 유적지이다.

교육·문화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있었고 산골짜기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서당의 정리가 진행된 뒤인 1930년에도 군내에 39개소의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서당 가운데 일부는 한말 개화기에 신학문을 접하는 개량서당으로 개편되기도 하였으나 그 활동면에서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911년에 개교된 개천공립보통학교였다. 1920년대에 유림계에서 광달학교(廣達學校)를, 김형철(金瀅哲)이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설립하였고, 보명학교(普鳴學校)도 개교하였다. 1945년 8·15광복 당시 개천군내에는 공립초등학교 7개교가 있었다.

종교 단체로 천도교와 장로교 등이 있었고, 천도교는 조양면 봉명리에 큰 시설의 종리원을 설립하여 각 면 소재지에 포교소를 두었으며, 각 마을마다 예배당이 있었다.

개천장로교회 출신의 장로 박관준(朴寬俊)은 1935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일본 국회에 헌의서(獻議書)를 살포하고 붙잡힌 뒤 평양으로 이감되었으며, 마침내 옥고로 순교하였다.

유림은 3·1운동 이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공성단(共成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펼쳤고, 향교 내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설립하여 유풍 진작에 힘쓰는 한편, 민족 사상 고취에 헌신하였다.

청년회·신우회(新友會)·학우회·개천협동조합·개천소년단·광덕소년회(光德少年會)·개천기자단 등의 각종 사회단체를 조직하여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군민 단합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신우회는 민중 계몽을 위하여 저명인사의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산업·교통

서부의 평야 지대는 토지가 비옥하지는 않지만 강수량이 많고 관개시설도 잘되어 있어 쌀의 산출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동부의 산악 지대는 논은 거의 없고 밭농사에 의존한다.

경지면적은 전체 면적의 21%이며, 주요 산물은 쌀·조를 비롯하여 피·콩·팥·수수·옥수수 등이며, 사과·복숭아 등의 과일도 산출된다. 그리고 담배·면화·깨·고추 등이 재배된다. 농가의 부업으로는 양잠·축우·양돈을 하며, 가내 제조품으로 명주가 유명하다.

근대적 공업으로는 고원읍을 중심으로 각종 화학공업이 발달하였고, 석탄·철강·흑연 등의 광산자원이 비교적 풍부하다. 용담탄광 등에서 질이 좋은 무연탄을 산출하고, 55% 이상의 질이 좋은 철광석이 개천읍 군우리와 중서면 천동갈철광 등에서 채굴된다. 흑연은 토상흑연으로서 다른 지방에서 산출되는 것보다 질이 좋다.

상품 교역을 위해서는 대부분이 공설 정기 시장을 이용하고 있다. 정기시장은 군우리장이 가장 활발한데, 만포선과 신안주선 등의 철도 개설로 관서의 덕천·영원·강계·희천·영변 등의 산출물과 본 군의 산물 교역이 활발하다.

개천장은 군양리에서 5일과 10일, 평원장은 평원리에서 2일과 7일, 무진대장은 삼소리에서 4일과 9일, 봉창장은 봉창리에서 2일과 7일, 조양장은 봉명리에서 1일과 6일, 북면장은 원리에서 3일과 8일에 열렸다.

농가의 부업으로 소의 사육이 활발하여 개천·조양·북원·평원·무서·봉창 등 우시장에서는 소의 매매가 성행하였다. 석탄·철광·흑연 등의 광산이 있어 광산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생활 잡화의 거래가 많은 편이다.

교통은 만포선 철도가 군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용원·천동·개천·원리·봉천·자작·남전 등의 역이 있다. 또, 개천역에서 신안주에 이르는 개천선이 부설되어 경의선과 연결되며, 도로는 대체로 철도 연변을 따라서 건설되었다.

읍·면

[개천읍 价川邑]

군의 북부 서단에 위치한 읍. 읍 소재지는 군우리이다. 원래 외서면(外西面)이었는데 1914년 안주군 동면 운흥리(雲興里) 일부를 본면 운포리에 병합하였고, 1929년에는 개천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에는 개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읍의 동쪽 끝 조양면과 북면이 접한 삼각 경계 지점에 비호산이 있고 견용리에 건지산이 있다. 읍 중앙에는 개천강이 서북쪽으로 흘러서 청천강으로 들어가고 북쪽에는 청천강이 서류하면서 도계를 이루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 생산이 제일 많고, 그 밖에 조·콩·팥·수수·밀·옥수수·메밀 등이 생산된다.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있으며, 양잠도 농가의 부업으로 매우 활발하다.

축산은 우량우 사육으로 유명하며, 군우리에는 큰 우시장이 있어서 소 매매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은 지하자원이 풍부한데, 군우리와 천동의 철광석, 용당의 무연탄 등은 질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교통은 순천역을 기점으로 한 만포선 철도가 읍의 중심을 관통하고 경의선이 개천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자동차 도로가 철도 연변을 따라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현룡리에 연주 현씨의 동족 마을이 있고, 신송리에 일명 묵방산성(墨坊山城)이라고 하는 토성으로 된 조양진(朝陽鎭) 옛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개천초등학교와 개천중견농민학교가 있으며, 군우(軍隅)·현룡(見龍)·용성(龍城)·마장(馬場)·송학(松鶴)·신송(新松)·운포(雲浦)·연당(蓮塘)·중흥(中興)·삼포(三浦) 등 10개 이가 있다.

[봉동면 鳳東面]

군의 남부 동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봉창리이다. 원래 외동면(外東面)이었는데, 1935년 순천군의 봉명면(鳳鳴面)을 병합하고 외동면과 봉명면의 이름을 따서 봉동면으로 개칭하였다.

중리에 고사산이 있고, 영원군의 소백산에서 발원한 대동강이 덕천군을 거쳐 면 중앙을 동서로 흐르고 있다.

농산물로는 쌀·조·콩·팥·수수·옥수수·밀·녹두·메밀 등이 생산되며, 군의 동부 산지 지역이 서부 평야 지대에 비해 쌀 생산이 적은 편이다.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있고, 양잠업이 활발하며, 잠사 생산업과 견직물 제직 공업도 발달하였다.

축산은 농우 사육이 활발하며 봉창리에 가축 시장이 개설되어 있다. 임업에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생산된 목재는 주로 광산 갱목재로 반출된다. 그 밖에 제탄업도 발달하였으며, 산채와 한약재도 많이 산출되고 있다.

산업도로가 순천읍과 덕천면에 각각 연결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봉하리에 석축으로 된 고사산성지(姑射山城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909년 당시의 면장이었던 김형철이 봉창리에 설립한 봉명학교가 있으며, 봉창(鳳倉)·중(中)·봉하(鳳下)·오봉(五峰)·상(上)·신흥(新興)·금평(金坪)·기양(岐陽) 등 8개 이가 있다.

[북면 北面]

군의 북부 동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원리이다. 서북쪽 영변군과의 경계선에 청천강이 서남류하고 있다.

산간지대로 쌀 생산은 극히 적고, 주요 농산물은 조·콩·팥·녹두·옥수수·메밀·수수 등이다.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재배되며 양잠업이 발달하였다. 축산업으로 원종우 사육이 주축을 이루며, 국유림·사찰림·사유림 등 많은 산림이 있어 건축재와 광산 갱목재에 쓰이고 있다.

평안남도 북부 탄전 지대는 용담탄광이 개발되어 양질의 무연탄이 생산되고 있으며, 만포선 철도가 북쪽 변두리를 통과하고, 자동차 도로가 철도 연변을 따라 개통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북원초등학교와 용담초등학교가 있으며, 원(院)·용등(龍登)·용연(龍淵)·인흥(仁興)·봉천(鳳泉)·삼봉(三峰)·용담(龍潭)·남전(藍田) 등 8개 이가 있다.

[조양면 朝陽面]

군의 동부 중앙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봉명리이다. 원래 군내면(郡內面)이던 것을 1917년 개천면으로 개칭하였고, 1929년에 내동면(內東面)을 본면에 병합하여 조양면으로 개칭하였다.

동림리와 덕천군과의 경계선에 백탑산(白塔山, 1,160m)이 있고, 북면덕천군과의 삼각 지점에는 월봉산(月峰山, 1,033m)이 있다. 동북쪽 덕천군과의 경계선에는 알일령이 솟아 있으며, 북쪽에는 군의 진산으로 이름 높은 대림산이 있다. 백탑산에서 발원한 남천강(南川江)은 승창리를 거쳐 북서류하고 있으며, 알일령에서 발원한 부연은 운흥리에서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

농산물로는 면 서쪽 평야 지대에서는 쌀이 생산되고, 동북부 산간 지역에서는 조·콩·팥·수수·녹두·옥수수·메밀 등이 생산되고 있다.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있고, 평야 지대에 개량 뽕밭을 조성하여 양잠업이 활발하다.

축산업으로 농우 사육이 발달하였고, 동북부 산간지대에는 산림이 울창하여 건축 목재와 광산 갱목재를 생산하고 있으며, 제탄업도 활발하다.

자동차 도로가 사방에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쌍룡리에 밀양 박씨의 동족 마을이 있으며, 동쪽에는 초연대가 있다. 140여 년 전 고을 수령이 이 위에 수선정을 세웠는데 1926년에 소실되고 말았다. 봉명리 서쪽에는 높이 4.9m의 9층석탑이 있다.

자동차 도로가 사통팔달로 사방에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군내 최초로 설립된 공립보통학교가 봉명리에 있다.

봉명(鳳鳴)·용복(龍伏)·승창(承昌)·용현(龍峴)·쌍룡(雙龍)·운양(雲陽)·저(苧)·당아(堂牙)·동림(桐林)·운흥(雲興)·신립(新立)·용봉(龍峰) 등 12개 이가 있다.

[중남면 中南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삼소리이다. 면의 남쪽 순천군과의 경계선 상에 주마산(走馬山, 383m)이 있고, 소백산에서 발원한 대동강 상류는 덕천군을 거쳐 봉동면의 중심으로 흘러 들어가 본면과 순천군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남류하고 있다.

군의 서부 평야 지대로서 쌀 생산은 많은 편이며, 이 밖의 농산물로는 쌀·조·콩·팥·밀·수수·녹두·옥수수·메밀 등이 있다. 특용작물로는 면화·고추·깨 등이 있으며, 근래에는 개량뽕·간작뽕 밭의 조성으로 양잠업이 발달하고 잠사생산업과 견직물 직조업이 발달하였다.

종우 사육 마을로 설정된 뒤에 우량우 생산이 늘고 있으며 삼소리에는 큰 우시장이 서고 있다. 용원리에는 1915년부터 철광이 개발되어서, 채굴된 원광석이 황해도 겸이포제철소로 반출되고 있다.

이 면의 서부면을 만포선 철도가 지나고 있으며, 순천에서 개천읍에 연결되는 도로가 면 동부를 관통하고 있다. 삼소리에 경치 좋은 무진대(無盡臺)가 있고, 인곡리에는 연주 현씨, 답도리에는 광주 이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중남초등학교가 있고, 삼소(三所)·인곡(仁谷)·청곡(靑谷)·잠계(岑溪)·용원(龍源)·남양(南陽)·답도(畓島)·광덕(光德) 등 8개 이가 있다.

[중서면 中西面]

군의 서부 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용전리이다. 1914년 안주군 동면의 봉상리(鳳祥里) 일부와 연풍리(延豐里) 일부를 병합하여 중서면으로 하였다.

이 면은 군 서부의 평야 지대로 주요 농산물은 쌀·조·콩·팥·수수·밀·옥수수·메밀·녹두 등이고, 특용작물로 면화·고추·깨 등이 재배된다. 농가에서는 양잠업이 행해지고, 잠사업과 견직물 직조업도 발달하였다. 우량우 사육으로 축산도 발달한 편이며, 천동의 갈철광은 55%의 함유량을 지닌 우수한 철광이다.

문화재로는 용운리 신현의 정통산 기슭에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를 제향하는 곳이 있고, 용호리에 장환성지(長桓城址)가 있는데 주위가 4,523m, 높이가 1.2m의 토성이다.

순천역을 기점으로 한 만포선 철도가 동쪽 변두리를 관통하여 개천읍에 연결되고, 산업도로가 중남면의 용원역에서 본 면을 관통하여 안주군의 동면에 연결되어 교통은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1926년 면민들의 모금으로 보명학원(普明學院)이 설립되었으며, 용전(龍田)·신현(新峴)·운룡(雲龍)·용흥(龍興)·용탄(龍灘)·전암(傳巖)·평원(平院)·용화(龍和)·용호(龍湖) 등 9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광복 이전의 행정구역이 대부분 그대로 이어지다가 1959년 9월 남전리가 남전노동자구로 바뀌었고, 1963년 12월 삼봉리·용진리·묵방리가 각각 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67년 10월 북원리·군우리·서포리·알일리 등도 노동자구로 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의 개편을 거쳐 1991년 1월 시로 승격되었다. →개천시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1985)
『개천군읍지』(1985)
『평안남도지』(평남도민회, 1985)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5)
『북한교육기관 및 문화재현황』(국토통일원, 1985)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85)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1)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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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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