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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인(京主人)

    조선시대사제도

     고려·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해둔 아전, 또는 향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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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인문기
    이칭
    경저리
    분야
    조선시대사
    유형
    제도
    성격
    관직
    시행시기
    고려, 조선
    시대
    고려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고려·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해둔 아전, 또는 향리.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일명 ‘경저리(京邸吏)·저인(邸人)·경저인’이라고도 하며, 사주인(私主人)에 대칭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이 일을 보는 처소를 경저·경재소·경소(京所)라 했으며, 고려 중기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경주인의 임무는 선상노(選上奴)주 01)의 입역과 도망한 선상노의 보충,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전의 공물 상납과 그 읍의 부세(賦稅) 상납에 관한 주선, 자기 고장 지방민에게 잠자리와 식사 제공, 공무나 번상으로 서울에 올라오는 관리나 군인들이 각 관청에 배치되어 종사할 때도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등, 잡다한 일을 주선하여 경향간의 연락을 꾀하는 동시에 향청(鄕廳)과 같이 지방관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입역자의 도망 및 상번(上番)하지 않는 자에 대한 보상, 중앙과 지방과의 문서 전달, 지방에서의 각종 상납물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납(代納)의 책임도 졌다. 그 외 신임 수령이 부임지 고을에 가기 전에 미리 통지문을 띄워 알리기도 하였다.
    특히, 대납의 과정에서 이들 경주인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세력과 결탁, 먼저 공물을 대납하고 나중에 몇 배의 이자를 붙여 지방 관청에 요구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 때문에 공납의무자인 농민을 더욱 괴롭히는 폐단을 발생시켰는데, 이를 방납(防納)의 폐라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고려 후기에도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성하였다. 세종·성종 연간에는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하여 종래 지방민을 경주인으로 삼던 제도를 폐지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을 경주인으로 고용하고, 역가(役價)라는 보수를 지급하여 지방 관청과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게 하기도 하였다.
    또 선상노 대립자가 부득이한 사유로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대립하고자 하는 자는 종래 경주인을 통하던 것을 수령이 직접 해당 관청에 보고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은 시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공물 청부업자의 구실도 아울러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저역(邸役)의 담당이 일종의 이권화하여 역가를 바치고 경주인으로서 공납 청부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울의 관리와 양반들은 경주인의 자리를 사들여 자기들 하인에게 그 일을 맡기고 이익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역가는 더욱 올라가서 대읍의 경우는 1만 냥이 넘고 소읍에서는 5,00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철종 13년 『삼정이정절목 三政釐整節目』에 보면, 경주인의 역가는 원정(元定)인 60석 이외는 일체 가산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관을 비롯하여 이속(吏屬)들이 경주인으로부터 빌려 쓴 돈이나 경저에 숙박한 비용은 빠른 시일 내에 갚아야 했는데도, 그것을 갚지 못하면 경저의 부채, 즉 저채(邸債)를 지게 되었다.
    게다가 여기에 또 이자를 붙여 청구하게 되어 자연히 그 액수도 증가, 조선 후기에는 각 지방 관청마다 4,000∼5,000냥의 저채를 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갚기 위해서는 농민을 수탈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도정치 때 백성들에게 각종의 부과세를 징수하는 등, 이서(吏胥)들의 부정·협잡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해 정약용(丁若鏞)은 영주인(營主人)과 함께 경주인을 나라 안의 큰 폐단으로 규정하고 이와 함께 경주인역가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즉, “저리(邸吏)의 폐단은 향리보다 심하다. 내가 어릴 적에 경주인이라는 자를 보았는데, 모두 노예나 하천(下賤)으로서 무뢰하고 비천한 자였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이 기풍이 크게 무너져,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000냥이나 되며 영주인의 자리는 1만냥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그 역가가 날로 증가되어 전보다 100배나 되었는데, 이것은 이익이 100배요, 백성을 벗겨낸 물건이 100배임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경저와 영저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기름진 관청의 아전과 권세 있는 가문의 청지기로서, 비단옷에 얼굴이 깎은 옥 같은 자가 곧 저리가 되었다.
    역가미가 오르는 이유는 네 가지인데, 첫째는 조정의 귀신(貴臣)이 저리자리를 사는 것이고, 둘째는 수령이 뇌물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은 것이고, 넷째는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함이다.”라고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 경세유표

    • 「경주인연구」(이광린,『인문과학』 7,연세대학교,1962)

    • 「경재소와 유향소」(이성무,『택와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1992)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지방에서 차출하여 중앙으로 보내는 노비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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