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득종 ()

영곡유고
영곡유고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중추원부사, 동지중추원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부(子傅)
영곡(靈谷)
시호
문충(文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88년(우왕 14)
사망 연도
1452년(문종 2)
본관
제주(濟州)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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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중추원부사, 동지중추원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고순원(高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신걸(高臣傑)이며, 아버지는 상장군 고봉지(高鳳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호군(大護軍) ·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세종 2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4년 후 풀려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고대방(典故大方)』
『지산집(志山集)』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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