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싸움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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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칠석 고싸움놀이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
민속·인류
놀이
국가유산
정월 대보름 전후에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 둥그런 모양의 ‘고’를 만들어 서로 맞부딪쳐 싸워 승부를 가리는 성인남자놀이.
국가무형유산
지정 명칭
광주 칠석 고싸움놀이(光州 漆石 고싸움놀이)
분류
무형유산/전통 놀이·무예/놀이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무형유산(1970년 07월 22일 지정)
소재지
광주광역시 남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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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월 대보름 전후에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 둥그런 모양의 ‘고’를 만들어 서로 맞부딪쳐 싸워 승부를 가리는 성인남자놀이.
내용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과거에는 광산 지방뿐만 아니라 장흥 · 강진 · 영암 등 주로 전라남도일대에서 정월대보름 전후에 행하던 격렬한 남성집단놀이이다.

둥그런 모양의 ‘고’를 만들어서 서로 맞부딪쳐 싸워 승부를 가리는 놀이로서, 근 20여 일간 계속된다. 보통 줄다리기에 앞서 고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장흥에서는 줄다리기를 고싸움이라 부르고 있으나 둘은 서로 다른 놀이이다.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칠석동, 속칭 옻돌마을에 전해오는 속설에 의하면, 이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와우상(臥牛相)이어서 터가 거세기 때문에, 그 거센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의 고싸움은 옻돌마을보다 다른 마을에서 더 성행하였으므로, 이 설의 근거는 약하다. 한편, 줄다리기에서 고싸움이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싸움은 음력 정월초승부터 전초전이 시작되며, 열 엿샛날에는 절정에 이른다. 상촌(上村)과 하촌(下村)의 대표들이 고싸움을 벌일 것을 합의하고 날짜와 장소를 정한다.

각 마을에서는 고싸움놀이를 지휘할 줄패장을 뽑는데, 신체가 건장하고 의지가 강하며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줄패장의 지시에 따라 마을 청년들은 집집마다 전답의 면적에 따라 짚단을 거두어 넓은 마당이나 한길에서 고줄을 만든다.

먼저 볏짚으로 세 가닥의 줄을 꼬아 기둥이나 나뭇가지에 묶어놓고, 세 가닥을 합하여 큰 줄을 만든다. 줄 세 가닥을 다시 합해 꼬아야 큰 줄이 되기 때문에, 장정 5, 6명이 오른쪽으로 비비틀어야 한다. 그때 줄을 단단하고 곧게 하기 위해서 매로 쳐서 다지기도 한다.

줄이 완성되면 고를 마련한다. 줄다리기의 줄은 튼튼하고 길면 되지만, 고줄은 줄머리에 둥근 고를 만들어 세운 당고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대쪽을 속에 넣고 팔뚝만한 동아줄로 칭칭 감아 고줄이 빳빳하도록 한 다음, 둥글게 구부리고 두 줄을 하나로 묶어서 커다란 고몸체를 만든다.

고몸체도 단단해야 하므로 큰 통나무를 속에 넣고 동아줄로 감아 곧은 줄을 만든다. 고머리나 고몸체 줄은 사람이 걸터앉아도 두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을 만큼 굵고 크다. 고몸체의 길이는 10m 내외이며, 몸체에서 두 가닥의 꼬리도 비슷한 크기로 만들어 전부 20m쯤 되게 한다.

줄이 완성되면 고머리를 40도쯤 되게 뒤로 젖혀서 고몸체에 Y자형의 통나무를 대고 떠받쳐 고정시킨다. 그 나무를 ‘굉○대’라고 한다.

고싸움은 양쪽의 수 백 명이 힘을 주어 고머리를 서로 부딪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 힘이 굉장하여 고머리가 부러지거나 옆으로 비뚤어지면 싸움에 지게 되므로 굉○대로 받쳐주는 것이다. 크고 둥근 고머리를 하늘을 향해서 뻗은 굉○대가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그 커다란 고를 사람들이 메고 싸워야 하기 때문에, 곱게 다듬은 7, 8개의 통나무로 받친다.

그 통나무를 ‘가랫장’이라 하며, 고를 메기 위한 것이지만, 고가 서로 부딪칠 때 떠받치고 밀어주는 구실도 한다. 고줄이 크고 무거우므로 가랫장 하나에 6, 7명의 사람이 매달려 들거나 메거나 해서 행진하고 나서 싸우게 된다.

정초 5, 6일 무렵 소년들은 작은 고를 만들어 어린이 고싸움을 벌인다. 아이들은 고를 메고 놀다가 이웃마을에 가서 시위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싸움을 건다.

“이겼네 이겼네/우리 동부가 이겼네/졌네 졌네 서부는 졌네” 이러한 노래로 시비를 걸고 야유를 하면 서부마을에서 소년들이 고를 메고 나와 싸움에 응하며, 그러한 과정이 몇 번 반복되는 사이에 마을끼리 싸울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열 나흗날 밤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당산과 마을 앞에 있는 할머니당산에서 당산제를 올리고 풍물을 치면서 밤새도록 논다.

대보름날은 하루 쉬고 열 엿샛날 아침에는 상 · 하촌의 농악대가 합동으로 마을 앞의 광장에서 놀다가 제각기 마을로 되돌아가서 마당밟이굿을 하고 논다. 고싸움의 전주가 되는 셈이다. 해가 지고 달이 솟을 무렵 횃불을 선두로 고를 메고 농악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시위를 하고 기세를 올린다.

싸움터로 나아갈 때 행렬 맨 앞에서 횃불잡이가 길 인도를 하고, 그 뒤에 동부는 청룡기, 서부는 백호기의 마을기[洞旗]와 농기(農旗) · 영기(令旗)를 든 기수들, 농악대가 서고 그 뒤에 고를 멘 사람들이 따른다. 고의 몸체는 장정들이 메지만, 뒷부분의 꼬리줄은 부녀자 20∼30명이 잡고 따른다.

고 위에는 줄패장과 부장(副將) 2, 3명이 올라탄다. 줄패장은 싸움을 총지휘하며, 부장들은 영기를 들고 휘둘러 시위를 한다. 부장 중에서 한 사람이 선소리를 메기면 고를 멘 놀이꾼들이 받는 소리로 “사―아 어듸허 어뒤―허” 하고 합창을 해서 기세를 올린다. 고싸움할 때 부장의 메기는소리와 놀이꾼들의 받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메기는 소리) 배를 무어라, 배를 무어라.

(받는 소리) 사―아 어뒤허 어뒤―허

삼강오륜으로 배를 무어라.

사―아 어뒤허 어뒤―허

효자충신 열녀로 돛을 달아

사―아 어뒤허 어뒤―허

아무리 질풍같은 풍파를 만나도

사―아 어뒤허 어뒤―허

내배 파선이야 될 수 있으랴.

사―아 어뒤허 어뒤―허

행렬이 싸움터로 나아갈 때는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노래부른다. 싸움터에 도착해서 상대편 고와 마주서면, 중머리구조의 빠른 가락으로 다음과 같이 부른다.

(메기는 소리) 지화자 허 허

(받는 소리) 지화자 허 허

달도 밝다

지화자 허 허

객사 청청

지화자 허 허

유색신은

지화자 허 허

나구 매고

지화자 허 허

노는 데로다

지화자 허 허

놀이꾼들은 노래에 발동작을 맞추고 전의(戰意)를 돋우어 사기를 높인다. 양쪽의 고가 서로 접근하면 고를 높이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고싸움의 승부는 한 쪽이 상대방의 고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기 때문에, 서로 기회를 노린다. 상황의 판단은 고 위에 올라 있는 줄패장이 한다. 줄패장이 “밀어라.” 하고 외치면, 놀이꾼들은 줄을 높이 들고 전진해서 상대방 고를 덮치려고 한다.

그러한 습격을 재빨리 판단한 상대방 줄패장은 역시 “밀어라.”하고 외치면 놀이꾼들은 “와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서로 고를 들고 밀기 때문에, 고끼리 부딪쳐 고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내려온다.

그때 앞에서 가랫장을 멘 놀이꾼들은 고가 높이 솟기 때문에 줄에서 떨어지며, 양쪽의 줄패장끼리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면서 혈전을 벌인다. 줄 위에서 싸우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기 쉽다.

서로가 밀고 밀치고 솟았다 내렸다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사이에, 농악대가 자기네 마을을 응원하기 위해서 신나게 농악을 치면 구경꾼들도 흥분해서 자기네 편의 고쪽으로 수 백 명이 모여들어 합세한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좌우로 회전하기도 하다가, 기회가 있으면 다시 돌진을 한다. 고가 부서지거나 땅에 닿아서 승부가 일찍 나는 수도 있으나, 팽팽히 싸워 밤을 새도 승부가 나지 않는 일도 있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힘을 쓰기 때문에 접전하다가 때로는 부상자가 나기도 한다. 흥분의 도가니 속에 남녀가 뒤엉키고 밀치는 일도 많다. 당일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일단 고를 풀어서 줄을 만들고, 2월초하룻날 줄다리기로 승부를 내기도 한다.

또, 승부가 났더라도 진 편이 다시 싸움을 걸어오면 응전을 하기 때문에, 정월스무날까지 날마다 고싸움이 계속되기도 한다. 고싸움에서 이긴 편은 고를 메고 의기양양 자기 마을로 돌아가 마을을 돌면서 승리를 자축한다.

그때 잘사는 집에서는 음식과 술을 준비하였다가 일행을 환영하고 위로를 한다. 동시에 농악놀이가 시작되고 노래와 춤으로 한때를 즐기게 된다.

고싸움은 놀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일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경의식으로 전승되었다. 즉, 고싸움에 있어 동부는 ‘수줄’이라 하고 서부를 ‘암줄’이라고 하는데,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고줄을 만들 때도 암줄을 수줄보다 더 크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고싸움은 그러한 농경의식의 성격과 대보름을 전후한 놀이 시기,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진 편제방식, 줄의 형태 등이 줄다리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

고싸움이 줄다리기와 다른 점은 줄을 당겨서 승부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고를 부딪쳐 땅에 닿게 하여 승부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승부방법은 ‘영산쇠머리대기’ · ‘안동차전놀이’와 비슷하다. 장흥지방에서는 광산지방의 이와 같은 고싸움놀이를 줄다리기의 전희(前戱)로 삼는 것으로 미루어, 광산의 고싸움놀이는 그 전희만이 분화, 독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싸움은 줄다리기와 마찬가지로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식의 한 형태이며, 놀이를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다지는 집단놀이로서 의의를 지닌다. 이 놀이는 광복을 전후해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69년 옛날의 놀이 모습을 되살려 이듬해인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 전수되고 있다.

기능보유자로 줄패장에 이판동(李判同) · 이순옥(李順玉), 고만들기에 이몽학(李夢學)이 인정되었다가 사망하였고, 그뒤 1987년 고만들기에 이인식(李仁植)이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세시풍속』(장주근, 형설출판사, 1984)
『한국의 민속놀이』(김광언, 인하대학교출판부, 1982)
『한국의 민속놀이』(심우성, 삼일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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