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원(權遠), 자는 중려(仲慮) · 여보(慮甫),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주1 어머니는 한양한씨(漢陽韓氏)로 정승 한종유(韓宗愈)의 딸이다.
어려서는 형인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자라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377년(우왕 3) 진사가 주2 1385년 문과에 을과로 주3해 문첩녹사(文牒錄事)가 되고, 이어 성균박사 · 밀직당(密直堂) · 장흥고사(長興庫使) · 군기주부(軍器主簿)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창왕 2) 액정알자감(掖庭謁者監)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 해 이조좌랑을 거쳐 군자감승(軍資監丞)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계속 등용되어, 1394년(태조 3) 광주판관(廣州判官)에 임명되고, 이듬 해 중부유학교수관(中部幼學敎授官)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는 사헌부사헌에 오르고 성균직강(成均直講) · 예조정랑 · 사간원좌헌납(司諫院左獻納) · 집현전지제교(集賢殿知製敎) · 예문응교(藝文應敎)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올랐고, 그 뒤 성균사예(成均司藝) · 사헌부집의 · 사간원우사간 겸 춘추편수관(司諫院右司諫兼春秋編修官)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에 올랐다.
1412년(태종 12) 예조우참의와 세자우보덕(世子右輔德)이 되었다가 곧 예조좌참의와 세자좌보덕이 되고, 형조참의를 거쳐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1415년 원주목사를 거쳐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객이 되었다.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두 번이나 시관(試官)이 되어 정인지(鄭麟趾) 등 명사 1백여 인을 선발하였다.
그는 글씨를 잘 썼으며 작품으로 그의 형 권근의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또한 시문에 능했으며 성리학과 『주역』에 밝았다. 당시 그의 학풍이 떨쳐져 정인지 · 안지(安止)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주4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