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군 ()

금산향교
금산향교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충청남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군.
정의
충청남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충청북도 영동군, 서쪽은 논산시 및 전라북도 완주군, 남쪽은 전라북도 무주군과 진안군, 북쪽은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 옥천군 등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19′∼127°38′, 북위 35°58′∼36°16′에 위치한다. 면적은 577.12㎢이고, 인구는 5만 487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54개 행정리(106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상리에 있다.

자연환경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각각 군의 중북부와 동남부를 지나, 지세는 이들 산계와 그 사이에 있는 고원상분지(高原狀盆地)로 나뉜다.

동쪽에 대성산(大聖山, 705m)·서대산(西臺山, 904m)·국사봉(國師峰, 668m)·천태산(天泰山, 715m)·월앙봉(月仰峰, 529m)·성주산(聖住山, 624m)·양각산(兩角山, 565m)·베틀봉(539m)·수로봉(水路峰, 506m)·덕기봉(德基峰), 서쪽에 대둔산(大芚山, 878m)·오대산(五臺山)·진악산(進樂山, 732m)·마이산(馬耳山, 627m), 북쪽에 망월산(望月山, 308m) 등이 잇달아 뻗어 있어 도내에서는 가장 큰 산악지대를 이루며, 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배티재가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진안군·무주군에서 발원하는 금강의 본류는 부리면 방우리, 제원면 천내리·용화리를 지나 충청북도 영동군으로 빠져나가 봉황천·기시천(掑嘶川)·금산천(錦山川)·조정천(鳥亭川) 등의 여러 지류를 합해 흐른다. 군 서북부 지방의 배수를 담당하는 유등천(柳等川)은 진산면에서 발원해 금강의 중류와 하류 부근에서 본류와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펼쳐지는데, 분지 중앙의 잔구성 구릉인 금성산(錦城山)을 분수령으로 해 서북부의 유등천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진산분지(珍山盆地)와, 동남부의 금강 및 그 지류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금산분지로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지질은 대체적으로 옥천계지층(沃川系地層)의 변성퇴적암지역(變成堆積岩地域)에 속해 인삼재배에 적합한 사질양토가 풍부한 편이다.

식생은 잣나무·죽류·사철나무·줄사철나무·팽나무·단풍나무·서나무 등이 자생한다.

기후는 대략 남한의 중앙부에 위치한 산악분지이므로 한서의 차가 심하며, 산지가 높기 때문에 같은 위도 상에 있는 도내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서리와 눈이 오는 날이 많고, 같은 군내에서도 분지의 평야부와 고산지대의 기온차가 3∼4℃에 달한다. 연평균 기온 12.2℃, 1월 평균기온 -1.4℃, 8월 평균기온 26.0℃, 연 강수량은 1,586.1㎜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굴된 것이 없으나, 제원면과 진산면에서 고인돌이 발견되고, 남일면의 덕천리·음대리 등에서 마제석검이 발견됨으로써 금산에서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진산면 묵산리와 추부면 추정리 및 금성면·복수면 등지에 허물어진 성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에는 금산군을 진내군(進乃郡 또는 進乃乙郡)이라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경덕왕 때에는 진례군(進禮郡)이라고 고쳤다. 한편, 옛 진산군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 또는 珍洞縣)이었는데 신라가 황산군(黃山郡)에 이속시켰다.

제원면에 있는 신안사(身安寺)는 583년(진평왕 5)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절로, 경순왕이 충청북도 영국사(寧國寺)에서 수학하다가 때때로 이곳에 들러 휴양하며 몸을 안정시킨 곳이라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1305년(충렬왕 31) 진례현을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부리현 등 5현을 이속시켰다. 이때 지금의 진산인 진동현을 옥계부(玉溪府)로 고쳤다가 그 뒤 충렬왕 때 금주군에 소속시켰다. 부리면에 있는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에는 고려 말의 충신인 길재(吉再)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1393년(태조 2) 만인산[胎峰]에 태조의 태를 묻은 뒤 고산현(高山縣)이던 진산을 진주군으로 승격시키고, 1413년(태종 13)에 금산군으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영규(靈圭)가 이끄는 700명의 의병이 금산 영근평에서 왜군과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그 뒤 의병 700명의 시체를 모아 무덤을 만들어 ‘칠백의총(七百義塚)’이라 했고, 금산눈벌[臥隱坪]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고인후(高因厚)·조헌·영규·변응정(邊應井) 등의 위패를 봉안했는데, 1663년(현종 4)에 종용사(從容祠)라고 사액되었다.

진산면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이 병력 1,500명으로 왜적 2만 명을 맞아 싸워 격퇴시킨 곳으로 묵산리에 권율의 이치대첩비가 있다. 영규는 휴정(休靜)의 제자로 200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조헌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는데, 1839년(헌종 5) 남이면에 그를 추모하는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가 건립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진산군을 금산군으로 편입하고, 금산군의 13개 면과 진산군의 6개 면을 통폐합해 10개 면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이곳 청년 대표인 김용술(金用述)·임승환(任勝煥) 등이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운동을 권고하는 ‘금산경고문(錦山警告文)’을 배포해 3월 23일 읍내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1940년 10월 금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 군북면에 내부(內釜)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금성면에는 위성통신지구국이 설치되었다.

유물·유적

선사유적으로 진산면 만악리, 제원면 구억리에서 기반식 고인돌이 발견되었으며, 구억리 고인돌에서는 마제석검과 돌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또한 금성면 양전리에서 마제석검·반월형석도, 남이면 대양리에서 마제석검·석창·돌칼·돌화살촉, 진산면 교촌리에서 마제석창, 복수면 다복리에서 마제석검이 각각 출토되었다.

산성으로는 남이면 역평리의 금산 백령성(충청남도 기념물, 1990년 지정)을 비롯해 자지성(紫芝城)·하신성(下薪城)·용문산성·곡남성·진산성 등이 있고 제원면 저곡리, 부리면 평촌리, 추부면 추정리에 성터가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제원면 신안리의 신안사에 신안사 대광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신안사 극락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남이면 석동리의 보석사에 보석사 대웅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93년 지정), 진산면 행정리의 태고사에 태고사 대웅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금산읍의 중도리에 삼층석탑, 아인리에 삼층석탑, 계진리에 석탑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금산읍 상리에 금산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진산면 교촌리에 진산향교(충청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 제원면 용화리에 용강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98년 지정) 등이 있으며, 사우로는 부리면 불이리에 청풍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금성면 상가리에 충렬사(忠烈祠), 복수면 곡남리에 표충사(表忠祠), 조헌사당(표충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남이면 마장리에 정충사(精忠祠) 등과 김종서(金宗瑞)를 제향하는 숭절사(崇節祠), 1883년(고종 20)에 세운 구암사(龜巖祠), 금성면 하신리에 온양이씨 어필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이 있다. 의총리에는 조헌 관련 유품(보물, 1989년 지정)이 보존되어 있다.

능묘와 비로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싸움에서 순국한 조헌·영규·변응정 등과 의병장의 유해를 모신 금성면 의총리의 금산 칠백의총(사적, 1963년 지정)을 비롯해 남이면 석동리에 의병승장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제원면 저곡리에 권충민공순절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진산면 묵산리에 권율장군 이치대첩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금산 이치대첩지(충청남도 기념물, 2000년 지정) 금성면 양전리에 고경명선생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1761년(영조 37)에 건립한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 제원면의 금산 천내리 용호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등이 있다.

이 밖에 추부면 마전리에 태조대왕 태실(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추부면 요광리에 금산행정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남이면 석동리에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990년 지정)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부리면 평촌리에 금산 물페기농요(충청남도 무형문화재, 1992년 지정), 금산 농바우끄시기(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 금성면 파초리에 금산 인삼백주(충청남도 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가 전승되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금산향교·진산향교가 있다. 금산읍 상리에 있는 금산향교는 하옥리에 세웠다가 1684년(숙종 10)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며, 진산향교는 1406년(태종 6)에 진산면 교촌리에 세운 것이다.

서원으로는 성곡서원·초려서원·산천재서원·용강서원·석포재서원 등이 있었다. 1617년(광해군 9)에 설립한 남이면 성곡리의 성곡서원은 이 고장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한 서원으로 김신(金侁)·윤택(尹澤)·길재·김정(金淨)·고경명·조헌의 6현을 배향했으나, 현재는 그 유허만 남아 있을 뿐이다.

금성면 하류리의 초려서원은 1633년(인조 11)에 윤선거(尹宣擧)가 설립하고 이유태(李惟泰)가 계승해 노론파의 근거지가 된 서원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남일면 음대리의 산천재서원은 윤증(尹拯)이 숙종 초에 설립해 소론파의 근거가 된 서원으로, 현재 폐허화되어 있다.

제원면 용화리의 용강서원은 현재 이 지방에 남은 유일한 서원으로 지금의 건물은 숙종 말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송준길·김원행(金元行)·유거(兪渠)·송명흠(宋明欽)의 5명을 배향했으며, 소론파의 산천재서원과 대립, 논쟁을 벌였다. 부리면 창평리의 석포재서원도 숙종 말에 지방 유림이 세운 것으로, 남인의 영도자였던 허목(許穆)을 배향한 금산 유일의 남인 서원이었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은 1907년 금산읍에 설립한 금산학교로 1911년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에 따라 금산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가 현재의 금산중앙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그 뒤 1개 면 1개 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4개교와 중부대학교가 있다.

이 밖에 1968년에 개원한 금산문화원은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하는 동시에 직업청소년학교 운영, 농촌문화단체의 지도와 육성, 도서실 운영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전통문화의 발굴·선양에 공헌하고 있으며, 금산인삼선양위원회를 두어 매년 10월에 이 지방 특유의 향토문화를 중심으로 한 축제행사인 금산인삼제를 거행하고 있다.

민속

이 지방의 주요 민속놀이로는 윷놀이·널뛰기·달맞이·다리밟기·그네뛰기·씨름·강강술래·기와밟기·닭잡기놀이·각시놀이, 그리고 좌도농악(左道農樂)을 들 수 있다. 좌도농악은 금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의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준령 산악지대에서 다분히 군악설(軍樂說)에 의해 발상된 농악으로, 전라우도·영남·경기 등지로 전파되어 이들 농악과 협화를 이룬다.

이 농악은 먼저 마을의 장원머슴을 뽑아 「길군악」을 치면서 주인집에 들어간다. 다음에 길굿·문굿·마당놀이·품앗이굿·잡귀 물리치는 굿·멍석말이·오방진굿·호호굿·갈림굿·각진굿·자진각진굿·훈련굿·홑영상·겹영상·개인기자랑·채상놀이·장구놀이·열두발상모놀이·파송굿의 순서로 진행되며 멍석말이로 끝을 맺는다.

이 지역에서는 마을 단위로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는데, 각 마을 어귀에 있는 고목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겨, 여기서 정월대보름에 제를 지낸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별다른 특색은 없다.

수륙재(水陸齋)는 1968년 음력 윤7월 17일에 제원면 천내강(川內江)변에서 행해졌는데, 몇 군데 절에서 합동으로 주최하고 일반 부녀자들이 참가하였다. 승려들의 의식과 참가자들의 자라방생으로 이루어진다.

설화·민요

이 지방에 전래되는 설화에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된 전설과 많은 민담이 있다. 이 가운데 금산읍 신대리 건너편 들인 「다금(多金)이들에 관한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 금산 지방에 정장자라는 사람이 다금리 약바위 밑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자기 집 쥐가 떼를 지어 산으로 도망가는 광경을 보고, 필연코 어떤 재난이 있을 징조라 여기고 서둘러 신대리 구셋들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며칠 뒤 여름 장맛비가 내려 그가 살던 옛 집이 홍수에 밀려 흔적도 없이 내로 바뀌었지만, 정장자는 쥐 덕분에 일찍 피신해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태고사와 생불 원효(元曉)의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한 어부가 파선을 당해 어떤 섬에 이르렀는데, 홍안백발의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부가 시장해 밥을 청했더니, 잠시 후 불기(佛器)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가져다주었다. 며칠 뒤 그 곳을 떠나려 하자 불기를 진산 태고사에 가져다주라고 해 불기를 가지고 태고사를 찾아갔더니, 그 불기는 전날 태고사에서 공양한 불기였고, 바둑을 두던 두 노인은 원효와 최치원(崔致遠)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동삼과 이시미설화」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옛날 이 지방의 한 부자에게 18세 된 딸이 하나 있었는데 밤마다 딸의 방에 정체 모를 총각이 찾아오므로, 아버지의 지시대로 딸은 총각의 옷자락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놓았다. 이튿날 그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산꼭대기에 동삼이 바늘에 찔려 있었다. 이를 가져다 달여 먹었더니 그 뒤부터 총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장사 나간 남편이 억울하게 죽어 고지새[靑鳥]가 되었다는 「고지새 열녀의 내력담」, 건달 심희수(沈喜壽)를 열심히 공부시켜 금산군수가 되게 하고 그의 선영하에 묻혀 지금까지 그 비석이 남아 있는 「명기 일타홍(一朶紅)의 이야기」, 「볼기 맞은 가짜양반 이야기」, 임진왜란 때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그를 짝사랑하다 죽은 처녀 혼령의 방해로 전투에서 패했다는 「제원나루이야기」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 구전되는 민요로는 대표적으로 농업노동요와 부녀요를 들 수 있다. 농업노동요는 남요 위주이며 「모심기노래」와 「논매기노래」 등 주로 논농사와 관련된 노래가 널리 불린다. 이 지역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논매기노래」가 있는데, 교환창으로 부르는 노래이므로 노래 부르는 이들의 마음이 두루 드러난다.

“얼럴럴 상사뒤여/이농사를 얼풋지어/나라에 상납도 하려니와/부모님 봉양도 하여보세/(후렴)/농사는 천하지 대본이라/농사밖에 또있는가/(후렴)/여보소 농부들 내말듣소/이논배미 다매고서/장구배미로 넘어가세/(후렴)/진악산 꼭대기 상상봉에/점심광주리 올라간다/(후렴)/집에있는 큰 애기들/삶은팥에 밥못할까/(후렴)/뒷동산에 살구꽃은·가지가지 피었는데/(후렴)/앞들뒷들 푸른벌판/보기만 하여도/배부르네/(후렴).”와 같이 노동현장의 생동감과 더불어 창자의 즉흥적 기분이 잘 나타나 있다.

남요 가운데 또한 널리 들을 수 있는 「상여소리」는 다른 지방에 비해 가락이 다소 빠른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곳이 산악지방이라는 지형적 특색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후렴이 짧으며 가락도 단조롭다. 노랫말에는 인생의 허무와 이별의 슬픔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천석만석을 싸놓고서/어허어 어어허/네얼굴이 일색인들/(후렴)/내몸하나 병들어지면/(후렴)/백사만사가 허사로다/(후렴)/북망산천이 멀다더니/(후렴)/대문밖이 북망일세/(후렴)/인제가면 언제올꼬/(후렴)/오실날이나 일러주게/(후렴)/금강산 높은산이/(후렴)/평지되면 오시려나/(후렴)/조선팔도 넓은바다/(후렴)/평야되면 오시련가/(후렴).”

그 밖에 이 지방이 본래는 전라북도였기 때문에 전봉준(全琫準)과 관련된 노래가 지금도 생생히 구전되고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간다.”

그리고 부녀요로는 노동요나 길쌈요보다는 유희요와 동요가 더 많이 전승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으로 「자장가」를 들 수 있는데, “자장자장 자는구나/우리아기 잘도잔다/은자동아 금자동아/수명장수부귀동아……은을주면 너를사랴/금을주면 너를사랴/일가친척 화목동이/동네방네 인심동이…….”와 같이 잠자는 아기의 소중하고 귀여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산업·교통

이 지역의 농경지는 총 106.87㎢이며, 이 가운데 논이 56㎢, 밭이 50.87㎢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밭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인삼 등이지만, 임야가 많은 산간지대이므로 식량의 자급은 어려운 형편이다. 인삼밭을 넓히려고 삼림을 남벌했기 때문에 버섯·약초를 제외한 임산물의 생산은 부진하다.

한때 인삼 생산량이 많아 ‘인삼의 금산’이라고도 불렸지만, 최근에는 생산량이 격감하는 추세이며 인삼의 가공업과 유통업에 치중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산면과 부리면에서는 과수재배와 양잠업이, 남이면에서는 양봉이 활발하다. 광공업은 진산면과 추부면의 석회석, 복수면의 무연탄, 부리면의 형석이 생산되나 그 양은 많지 않다. 이 외에 양조·제재·제약업 등의 제조업이 이루어지나 영세 규모이다.

시장으로는 정기시장 2개, 상설시장 10개, 가축시장 1개가 있다. 정기시장으로는 금산읍에서 2·7일에 장이 서고, 주요 거래품목은 인삼이며 그 밖에 생약재로 목단·감초·황기·질경·천궁·백작약·적작약·산수유·황부자·일당귀 등과 보리·잡곡·콩·감자·채소·과실 등이 거래된다.

추부면에서는 2·7일에 장이 서고, 주요 거래품목은 인삼류·특용작물·전작류 등이다. 광복 이후 면마다 정기시장을 만들어 거래편의를 도모했으나, 현재 교통의 발달로 지역 간 결합이 원활해 추부면의 시장만이 그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상설시장은 각 면 소재지마다 분포한다.

그러나 면지역의 대부분이 대전과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어, 최근 들어서는 상설시장도 인삼시장을 제외하고는 활기를 잃어 가고 있다. 가축시장으로는 금산읍에서 열리는 우시장이 있는데, 인접해 있는 무주군과 진안군까지 이 시장의 세력권이 뻗치고 있다.

교통은 대전광역시 동구와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으로 통하는 33번 국도 이외에 690번, 698번, 795번 등의 지방도가 금산읍을 중심으로 교차하고, 601번과 635번 지방도가 이들 도로들과 교차하고 있어 편리하다.

특히 37번 국도는 금산군뿐만 아니라 무주군 등지에서 대전광역시로 진입하는 도로로서 교통량이 많다. 통영대전고속국도가 37번 국도에 인접하여 금산군은 내륙에서 대전과 전라북도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광

이 군은 금산읍의 인삼시장, 군 전역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인삼포, 많은 의병 및 열사들의 유적과 명승지를 관광자원으로 하고 있다. 특히 조헌·고경명 등 의병의 숨결이 어려 있고, 금산팔경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금산팔경은 노령산맥을 금강이 개석(開析: 골짜기가 침식작용으로 여러 새로운 지형으로 변화하는 작용)해 이룬 산간분지로 금산팔경 가운데 네 곳은 산, 나머지 네 곳은 강이다. 충청남도에서 가장 험한 산악지대로서 대전과 가까워 관광객이 많다.

여덟 곳을 살펴보면, 대둔산은 기암괴석과 선송장폭(仙松長瀑)에 가을단풍이 유명하고, 일출일몰 때 장관을 이룬다. 또한 전망이 좋아 소금강으로 불리는 충청남도의 도립공원으로서 신라시대 원효가 개창한 태고사가 있다. 서대산은 충청남도에서 제일 높은 산(904m)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진악산은 금산군의 진산으로 보석사가 있고, 동쪽의 국사봉 깊은 산골에는 신안사가 있다.

강변 경승지로는 부리면의 적벽강(赤壁江), 남이면의 십이폭포, 부리면의 평촌 귀래정, 제원면의 천내강 봉황대가 유명하다.

금산군에서는 사계절마다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봄에는 산꽃축제, 여름에는 금강 민속축제, 가을에는 금산 인삼축제, 겨울에는 금산 장돌달맞이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읍·면
  1. 금산읍(錦山邑)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읍. 면적 21.72㎢, 인구 2만 399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상리이다. 금산읍은 백제 때 진내군에 속했고 1940년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금산군이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이관되면서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금산분지의 중앙에 위치하며 기반암은 백운모화강암이 주종을 이룬다. 토양은 풍화된 사질양토가 대부분이다. 읍의 중앙부를 작은 하천들이 동류하며, 이들 하천연안은 군내 제일의 평지를 이룬다. 경지면적은 825㏊로서 군내에서 경지비율이 가장 높으나, 산악지이므로 밭의 면적이 논의 면적보다 넓다.

주산업은 농업이며, 벼농사와 인삼재배가 활발하다. 금산읍의 특산물인 인삼은 광복 후 개성인삼의 공급이 중단되면서부터 활발히 재배되었다. 여름에도 서늘한 고원성의 기후가 인삼의 생육에 적합해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삼산지로 발전함에 따라 ‘인삼의 금산’으로 불린다.

그러나 인삼은 연작을 꺼리는 작물이므로 새로운 인삼재배지의 확보와, 인삼경작 후 경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금산읍의 발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금산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백삼으로 가공되어 금산인삼경작조합을 통해 판매된다. 5일마다 열리는 금산장은 ‘인삼장’으로, 강화나 포천 등지의 인삼장과는 규모가 견줄 수 없을 만큼 커서 전국 인삼의 80% 정도가 이곳에서 거래된다. 광복 이후 줄곧 이곳에서 정해진 인삼 값이 전국 어디서든지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교통은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의 3도를 잇는 중간지점인 금산읍은 전라북도의 전주·진안·무주와 충청북도의 영동·옥천, 그리고 대전과 연결되는 도로교통의 중심지이며, 특히 대전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교통량도 많다.

문화유적은 상리에 금산향교,중도리·아인리·계진리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상리(上里)·중도리(中島里)·신대리(新垈里)·하옥리(下玉里)·아인리(衙仁里)·상옥리(上玉里)·계진리(桂珍里)·양지리(陽地里)·음지리(陰地里) 등 9개 리가 있다.

  1. 군북면(郡北面)

군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8.10㎢, 인구 2,72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두두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북일면(北一面)과 서이면(西二面)의 일부를 합해 만든 것이다.

지형이 삼분되어 있어 행정상 불편한 점이 많다. 생활권은 동쪽의 상곡분지는 충북권, 서쪽의 내부분지는 금산읍권, 중간의 두두분지는 제원권으로 나뉜다. 그 사이에 철마산과 서대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서대산은 충청남도의 최고봉으로 대전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

내부천과 두두천은 남류하는 봉황천의 지류이며 상곡천만이 북류한다. 산악지대로 경지면적은 좁은 편이나 농업이 주업이다. 특산물로는 감자·잎담배 생산이 군내 1위이고, 인삼과 누에고치도 생산된다. 도로는 서쪽의 내부분지에는 금산읍∼대전 간 도로가 북쪽으로 통하고, 중앙부에는 제원∼추부면 간 도로가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동편리에 동광사가 있고, 두두리에 300년생의 느티나무가 있다. 두두리(杜斗里)·호치리(虎峙里)·내부리(內釜里)·외부리(外釜里)·천을리(天乙里)·동편리(東片里)·조정리(鳥亭里)·보광리(寶光里)·상곡리(上谷里)·산안리(山安里) 등 10개 리가 있다.

  1. 금성면(錦城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71㎢, 인구 3,66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상가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일면(西一面)·서이면·북일면의 일부를 합해 만든 것이다.

기신천이 평야의 중앙부를 동류하고, 북쪽에 금성산이 우뚝 솟았으나 산지는 적은 편이다. 농업이 주업이며 곡창지대를 이룬다. 소류지를 이용한 수리안전답이 많으며 개간도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인삼·과실·누에고치·잡곡 등이 있다. 도로는 금산읍에서 전주로 가는 도로가 중앙부를 서북으로 달리고, 대전으로 통하는 도로가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화림리에 300년생의 느티나무와 하류리에 300년생의 버드나무가 있고,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의총리에는 조헌·영규를 비롯한 칠백의사를 제향하는 종용사가 있다. 그 밖에 상가리에 충렬사, 양전리에 고경명비가 있다. 상가리(上佳里)·양전리(陽田里)·도곡리(道谷里)·화림리(花林里)·두곡리(杜谷里)·파초리(芭蕉里)·의총리(義塚里)·마수리(馬首里)·하신리(下薪里)·대암리(大巖里)·하류리(下柳里) 등 11개 리가 있다.

  1. 남이면(南二面)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98.20㎢, 인구 2,20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하금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에 고산군(高山郡)의 건천리(乾川里)를 편입시켜 만들었다.

면적은 군내에서 가장 크고 산지면적도 가장 크다. 북쪽에는 진악산, 서쪽에는 험준한 고지(656m)가 솟아 있고, 남쪽에는 십이폭포가 관광지를 이룬다. 봉황천 상류지대로 건천리·대양리·구석리에서 발원한 계곡이 동류한다.

군내에서 임야면적이 가장 넓으며, 밭과 논은 적은 편이다. 특산물로는 누에고치·감자·인삼·철·버섯 등을 생산한다. 도로는 면의 동쪽 금산읍에서 주천면으로 가는 도로가 갈라진다.

문화유적은 석동리에 보석사, 건천리에 백령사, 성곡리에 성곡서원, 마장리에 정충사, 영규를 봉안한 의선각(毅禪閣)과 숭장비가 있고, 개삼터가 있어 매년 인삼제를 지낸다. 하금리(下金里)·상금리(上金里)·건천리(乾川里)·역평리(驛坪里)·대양리(大陽里)·흑암리(黑巖里)·구석리(九石里)·매곡리(梅谷里)·석동리(石洞里)·성곡리(星谷里) 등 10개 리가 있다.

  1. 남일면(南一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06㎢, 인구 2,99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현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일남면(一南面)과 이남면(二南面) 및 부서면(富西面)의 일부를 합쳐 만든 것이다.

봉황천의 중류유역을 차지하는 평야지대이다. 봉황천 지류는 초현천(草峴川)·흑암천·신정천의 3개이다. 홍수 때면 피해를 입는 일이 있었으나 제방공사가 완공되어 피해가 줄었다. 남북으로 가느다란 강변에 발달한 분지이기 때문에 곡풍(谷風)의 영향이 크다.

농업이 주업이나 논 면적은 군내에서 제4위, 밭 면적은 가장 작다. 주요 농산물인 쌀 외에 특산물로 잎담배·잡곡·누에고치·인삼 등이 생산된다. 마장리에는 인삼가공공장이 있다. 도로는 금산읍에서 진산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천리에서 마제석검 1점이 출토되었으며, 황풍리의 황풍사(皇風祠), 마장리의 정충사·숭모사(崇慕祠), 초현리의 정의사(靖義祠)가 있다. 초현리(草峴里)·황풍리(皇風里)·마장리(馬壯里)·상동리(上桐里)·덕천리(德川里)·신정리(新亭里)·신동리(新洞里)·음대리(陰大里)·신천리(新川里)등 9개 리가 있다.

  1. 복수면(福壽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6.64㎢, 인구 3,45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곡남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군으로 편입되어 북면과 일남면, 서면을 합했으며 다복리와 수영리의 양 지명을 따서 복수면이라 하였다.

유등천의 남북으로 뻗은 양안에 길게 곡저분지가 발달해 있으며 서쪽에는 대둔산계, 동쪽에는 태봉산계(胎峰山系)가 있다. 유등천의 발원지는 세 곳으로 진산면의 묵산리·엄정리 및 복수면의 목소리이다.

농업이 주업이나 논 면적은 군내에서 가장 작고, 밭과 임야면적도 작다. 특산물로는 인삼·누에고치·잎담배·콩·소·석탄 등이 생산된다. 최근에는 채소·과일·낙농업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고 북쪽에는 공장도 세워지고 있어, 앞으로 서대전의 도시권 확대에 따라 그 발전이 기대된다.

도로는 곡남리가 교통의 중심지로 금산에서 진산으로 이어져 서대전으로 연결되며, 동쪽에 추부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문화유적은 곡남리에 표충사와 수심대(水心臺)가 있다. 곡남리(谷南里)·용진리(龍津里)·다복리(多福里)·수영리(壽永里)·목소리(木巢里)·백암리(白巖里)·구례리(九禮里)·신대리(新垈里)·지량리(芝良里) 등 9개 리가 있다.

  1. 부리면(富利面)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45㎢, 인구 2,78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현내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동면(富東面)·부서면·부북면(富北面)의 일부를 합해 만든 것이다.

면의 동쪽에서 금강의 주류가 협곡을 따라 흐르고, 서쪽은 그 지류인 부리천(富利川) 유역의 분지로서 금산군의 3대 곡창 중 하나이다. 수통리의 적벽강과 신촌리의 송림은 경관이 아름다운 유원지이고, 동쪽에는 양각산(羊角山, 567m), 남쪽에는 갈선산(葛仙山, 456m)이 솟아 있으며, 곡간평야가 남북으로 전개되어 곡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농업이 주업이며, 특산물로는 누에고치·감자·약용작물·잎담배·소·인삼·잡곡·형석(螢石) 등이 있다. 도로는 금산읍에서 무주로 연결되는 도로가 면의 서쪽을 남동으로 달리고 있어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평촌리에 산성, 불이리에 길재를 봉안한 청풍사가 있다. 현내리(縣內里)·창평리(倉坪里)·선원리(仙源里)·관천리(冠川里)·불이리(不二里)·양곡리(陽谷里)·평촌리(坪村里)·신촌리(新村里)·어재리(於在里)·예미리(曳尾里)·수통리(水通里)·방우리(方佑里) 등 12개 리가 있다.

  1. 제원면(濟原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59㎢, 인구 3,10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제원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조선조의 제원역에서 유래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북면·동일면(東一面)·군북면의 일부를 합해 만든 것이다.

면의 남동쪽에 금강 지류가 광석리 협곡을 이루어 배수불량으로 지류인 봉황천 유역에 큰 퇴적분지를 이루고 있다. 천내강에는 천연기념물인 어름치[氷魚]가 서식한다. 면의 북쪽에 국사봉이 솟아 있고, 두두천(杜斗川)·신안천(身安川)·기신천이 남류해 곡저평야를 이루고 있다.

농업이 주업이며, 하천의 정리가 잘 되어 있어 금산군 2대 곡창지대의 하나이다. 특산물로는 인삼·양잠 등이 있다. 도로는 금산읍에서 동쪽 영동으로 가는 도로가 면의 중앙부를 달리며, 제원리에서 북쪽의 군복면을 지나 추부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서부에 개통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구억리에 고인돌, 신안리에 신안사(身安寺), 천내리에 용호석 등이 있으며, 저곡리는 임진왜란 때 권종이 격전한 전적지로 유명하다. 그 밖에 사당으로 대산사(大山祠)·육모재(陸慕齋)가 있다. 제원리(濟原里)·명암리(鳴巖里)·수당리(水塘里)·명곡리(明谷里)·구억리(九億里)·동곡리(洞谷里)·길곡리(吉谷里)·신안리(身安里)·대산리(大山里)·저곡리(楮谷里)·금성리(金性里)·용화리(龍化里)·천내리(川內里) 등 13개 리가 있다.

  1. 진산면(珍山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53㎢, 인구 3,36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읍내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군에 편입되었고, 지금의 명칭은 진산군에서 유래된 것으로 군내면에 이남면(二南面)과 서면의 일부를 합해 만든 것이다.

산지가 많고 서쪽에 소금강이라 불리는 도립공원 대둔산이 있으며, 그 남쪽에 배티재가 있다. 하천은 유등천의 상류로서 모두 북류하며, 지방리와 곡남리 쪽으로 흐르는 2개의 지류가 있다.

농업이 주업이며, 밭 면적은 군내에서 가장 크고 삼림지역이 그 다음이며 논 면적은 작은 편이나, 개간과 조립이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인삼·누에고치·잎담배·약용작물·콩·금속광물·연료·소 등이 있다.

최근 대전의 도시화 영향으로 채소·과실·낙농업 등이 활발하며, 공장도 들어서서 도시계획지구로 되어 있다. 도로는 금산읍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도로가 중앙부를 서쪽으로 통과하고, 부암리에서 남쪽 남이면의 도로와 서쪽 논산시로 가는 도로가 갈라지며,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교촌리에 진산향교, 읍내리에 진산성, 행정리에 태고사가 있으며, 배티재는 임진왜란 때 권율의 전승지로 큰 배나무가 있다. 읍내(邑內)·만악(晩樂)·엄정리(嚴亭里)·부암리(浮巖里)·삼가리(三佳里)·오항리(烏項里)·석막리(石幕里)·교촌리(校村里)·묵산리(墨山里)·행정리(杏亭里)·두지리(斗芝里)·막현리(莫峴里)·지방리(芝芳里) 등 13개 리가 있다.

  1. 추부면(秋富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9.12㎢, 인구 6,5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마전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군에 편입되었고, 진산군의 동일면과 동이면을 합한 것으로 지금의 명칭은 추동(秋洞)과 자부리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에 충청남도 최고의 서대산을 정점으로 북쪽에 마달령(馬達嶺)과 만인산(337m)이 있으나, 태봉재의 터널을 통해 대전과 가깝게 이어진다. 서화천(西華川) 연안의 추부분지는 마전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농업이 주업이며 밭면적은 군내 제3위이고, 논도 많으나 임야는 적은 편이다. 특산물로는 인삼·소·잎담배·콩·약용작물·누에고치·석회석 등이 생산된다. 교통이 편리해 시장이 발달하고, 대전의 근교지역으로 채소·과일·낙농업이 활발하며 공장도 들어서 있다. 도로는 대전과 연결되고, 마전리에서 동쪽은 옥천, 서쪽은 진산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서대리에 원흥사, 마전리에 태실, 추정리에 성지가 있고, 요광리의 은행나무는 1,500년이 넘은 것으로 둘레가 15.5m나 된다. 마전리(馬田里)·추정리(秋井里)·용지리(龍地里)·자부리(自富里)·장대리(場垈里)·요광리(要光里)·신평리(新坪里)·성당리(聖堂里)·서대리(西臺里)·비례리(備禮里) 등 10개 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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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시(www.geum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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