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정언, 칠원현감, 전적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천우(天佑)
삼족당(三足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79년(성종 10)
사망 연도
1551년(명종 6)
본관
김해(金海)
주요 관직
전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정언, 칠원현감, 전적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김극일(金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손(金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 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대동야승(大東野乘)』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
『탁영집(濯纓集)』
『남명집(南冥集)』
『대동기문(大東奇聞)』
『해동잡록(海東雜錄)』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