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천우(天祐), 호는 삼족당(三足堂). 김극일(金克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고, 아버지는 직제학 김준손(金駿孫)이며, 어머니는 사도시정(司䆃寺正) 고태익(高台翼)의 딸이다.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다. 조광조(趙光祖)·조식(曺植)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유일(行誼遺逸)로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 문과에 3등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정언·칠원현감(漆原縣監)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제(科第)를 삭탈당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현량과가 복과(復科)되면서 전적에 재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 향리로 돌아가 죽었다.
현량과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선암사(仙巖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