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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金躍淵)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간민교육회 임원, 회장, 간도 한인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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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간민교육회 임원, 회장, 간도 한인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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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규암(圭巖).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김정규(金定圭)·문정호(文政鎬)·문치정(文治政) 등 10여 가구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간도의 명동(明東)에 자리잡은 이들은 동가(董家)라는 중국인의 임야 수백 정보를 구입하여 개간을 서두르면서 한인 마을을 만들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인재를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고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숙(私塾)을 설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간도로 망명해 온 애국지사들이 1906년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신교육을 통한 민족의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숙장(塾長) 이상설이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에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계속된 탄압으로 1907년 9월 서전의숙은 폐교되고 말았다.
이 때 서전의숙에 적을 두었던 김약연의 종제인 김학연이 명동으로 돌아오는 것을 계기로,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개교 당시 학생 수가 42명이었던 명동서숙은 명예숙장에 박무림(朴茂林), 숙감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 교사에 김학연·남위언(南葦彦)·김하규(金河奎) 등이 교사로서 한문·수학·역사 등을 가르쳤다.
1909년 서울 청년학관 출신인 정재면(鄭載冕)이 교사로 들어오면서 기독교교육으로 전환하였으며, 학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어 1910년 3월 명동중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황의돈(黃義敦)·박태환(朴泰煥)·장지영(張志暎)·김철(金哲) 등 우수한 교사들이 부임하여 왔다. 1911년에 명동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910년 3월 중국지방당국의 인가를 받은 북간도 한인의 첫 사회단체인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의 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13년 4월 간민회(墾民會) 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어 한인 자치에 힘썼다. 1919년 2월 25일 간도 한인 대표로 러시아 니콜스크(Nicolsk)에서 열리는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에 참석하였다.
1919년 3월 간도 용정의 만세사건과 명동학교의 전소 및 상해임시정부 각료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간도로 돌아오던 중, 중국 정부에 연금 되어 연길(延吉) 감옥에서 3년간 구금당하였다.
1925년 명동중학교가 용정(龍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편입됨에 따라, 15년 동안 가꾸고 다듬었던 교육 사업은 축소되었지만, 명동소학교를 유지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1929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37년 용정으로 이사온 뒤로는 은진중학교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학교 뒷바라지를 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호일
영역닫기영역열기 관련 멀티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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