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 ()

김기진(김팔봉)
김기진(김팔봉)
현대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가련아」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나도 가겠습니다」 등을 저술한 시인. 평론가.
이칭
이칭
팔봉(八峰), 구준의(具準儀), 긔진, 동쵸, 동초(東初), 여덟뫼, 팔봉산인(八峰山人), 팔봉생(八峰生)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 6월 29일
사망 연도
1985년 5월 8일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충청북도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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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가련아」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나도 가겠습니다」 등을 저술한 시인. 평론가.
개설

일제강점기에 형인 김복진과 함께 일본 릿쿄[立敎]대학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를 설립했다. 1923년 귀국 이후 문예단체 파스큐라 및 카프 창립에 참가해, 다수의 시와 수필 및 비평문을 발표했으며 『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일보』 등의 기자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기에는 다수의 친일 시와 글들을 남겼으며, 해방 이후 '애지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했으며, 다수의 수필집과 역사소설을 남겼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3년 충청북도 청원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 이후 충청북도 황간(黃澗)·제천·영동(永同)군수를 지낸 김홍규(金鴻圭)가 부친이고,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또는 金福鎭)은 형이다. 1913년 부친의 영동군수 부임으로 영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16년 졸업했다. 그해 4월 형 김복진과 함께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재학 중 1920년 초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해 4월 『동아일보』에 동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시 「가련아(可憐兒)」로 등단했다. 1921년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예과에 입학했고 사회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2년 5월 형인 김복진·박승희(朴勝喜)·이서구(李瑞求) 등과 함께 재동경조선인유학생 연극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주도적으로 결성했고, 이듬해 5월 토월회 귀국공연을 위해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귀국했다.

1923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개벽(開闢)』 1923.7)이라는 비평문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정식 등단했고, 9월 문학동인지 『백조(白潮)』의 창립 동인으로 참가했다. 1924년 새로운 경향의 문학을 제창하며 문예단체 파스큐라(PASKYULA)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고, 10월부터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 기자로 이직했으며, 8월 문예단체 염군사(焰群社)와 파스큘라가 합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발족할 때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26년 『시대일보』의 폐간과 『개벽』의 무기정간으로 『조선지광(朝鮮之光)』으로 발표 지면을 옮겼고, 1926년부터 『중외일보(中外日報)』에 취직했다. 1927년 영화연구모임 찬영회(讚映會)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처가가 있는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 공장을 설립했다가 실패했다. 1930년 『중외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다가, 8월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정어리 공장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장편소설 「해조음」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자술서를 쓰고 1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전주 사건 또는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으로 형 김복진과 함께 전주경찰부에서 조사를 받고 7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8년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으로 취직, 1940년까지 근무했다. 1938년 9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호남과 남해안 시찰에 동행하며 기사 '남총독 수행기'를 썼다. 1939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로써 설립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일제가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을 읊은 시 「아세아의 피」(『매일신보』 1941.12.13·16)를 발표했다.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촉탁을 지내면서 「조선영화의 새출발[朝鮮映畵の新出發)」(『춘추(春秋)』 1942.8)라는 글을 통해 조선영화가 추구해야 될 안건으로 ‘국어(일본어)의 보급, 내선일체 철저, 직역봉공(職域奉公)’ 등을 거론했고, 일본군의 필리핀 마닐라 점령을 축하하는 「대동아전쟁송」(『조광(朝光)』 1942.2)을 썼다. 1943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조선문인협회를 포함한 4개 단체가 통합·출범한 조선문인보국회의 평론수필부회 평의원, 이듬해 상무이사가 되었다. 또한 1943년 8월에 조선인 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를 비롯하여 징병과 학병을 선전·선동하는 「나도 가겠습니다」(『매일신보』 1943.11.6)·「가라! 군기(軍旗)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매일신보』 1943.11.6) 등의 시를 썼다.

1944년 2월 태평양전쟁 3주년 기념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서 조직한 보도특별정신대(報道特別挺身隊)의 강사로 강원도 지역에, 5월에는 증산위문 파견행사의 일환으로 함경북도 길주의 북선제지(北鮮製紙)공장으로 파견되었다. 6월에는 조선인문인보국회 주최 결전태세즉응재선문학자총궐기대회(決戰態勢卽應在鮮文學者總蹶起大會) 준비위원을 맡았고, 역시 조선문인보국회가 주최한 8월 17일 부민관(府民館)에서 열린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미영 격파와 아시아의 해방, 전력의 급속 증강, 반도 문화인의 사명'을 강조한 「문화인에 격(檄)함」(『신시대(新時代)』 1944.9)이라는 강연을 했다. 또한 11월에는 중국 난징[南京]에서 개최된 제3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 7월 대일본흥아회(大日本興亞會) 조선지부 총무위원 등을 맡았다. 이외에도 다수의 친일좌담회에 참석했고 다수의 관련 글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34년 김복진과 함께 설립했다가 실패한 출판사 애지사(愛智社)를 재설립·운영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7월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 즉결처분을 받았으나 닷새 뒤에 다시 살아났고, 이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해 1951년 「나는 살아 있다」라는 글을 썼다. 1951년 5월 대구로 피난,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했고 이듬해 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며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3년까지 주로 '전선문학'에 관한 글을 썼다. 1954년 「나의 토월회 시대」 등과 같은 수필류와 문단 관계 회고류의 글을 썼고, 역사소설류의 글인 『통일천하』를 1955년부터 1956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같은 역사소설류의 글들을 썼다.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를 비판했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을거쳐, 1966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 1967년 소아마비특수아동보육협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등을 비롯하여 한국펜클럽·한국문화협회 고문, 세계복지연맹한국본부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85년 5월 8일 사망했다. 1989년 『김팔봉문학전집』(전7권)이 발간되었다.

상훈과 추모

금성화랑무공훈장(1952),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8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하는 '팔봉비평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현대문학대사전』(권영민, 2004)
『아버지 팔봉 김기진과 나의 신앙』(김복희, 정우사, 1995)
『개벽(開闢)』
『동아일보(東亞日報) 』
『매일신보(每日新報)』
『삼천리(三千里) 』
『신시대(新時代)』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춘추(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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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심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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