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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섣달 그믐날 궁중에서 묵은 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궁궐의례.
이칭
이칭
구나(驅儺), 대나(大儺), 나희(儺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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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음력 섣달 그믐날 궁중에서 묵은 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해 행하던 궁궐의례.
내용

‘구나(驅儺)·대나(大儺)·나희(儺戱)’라고도 한다. 섣달 세밑[歲末]의 바쁜 중에도 각 가정에서는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고, 거름을 치워내고, 가축우리를 치워 새로 짚을 넣어 깔아주며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을 한다.

또한, 밤중(자정)에는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爆竹)을 터뜨린다. 집안에 있는 잡귀·사귀(邪鬼)를 모조리 몰아내고 정(淨)하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벽사(辟邪)를 위하여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 궁(宮)이 정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정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연말에 구나(驅儺)하는 풍속은 일찍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후한서』 예의지(禮儀志)에 의하면 납일(臘日) 하루 전에 축역(逐疫)하는 큰 나례 행사가 있었는데, 황문(내시)자제(黃門子弟) 중에서 10세에서 12세까지의 120인을 뽑아 진자(侲子 : 아이 초라니)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궁중의 나례 의식은 고려 정종(靖宗) 6년 무렵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권64 지(志) 권18 예(禮) 6 군례조(軍禮條)의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에 의하면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뽑아 진자로 삼아 이들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袴褶 : 바지 위에 덧입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騎服)을 입힌다. 24인이 1대(隊)가 되는데, 6인을 한 줄로 하며 대개 2대이다.

집사자(執事者)는 12인인데 붉은 모자와 소창옷[褠衣]을 입고 채찍을 잡는다. 공인(工人)은 22인이며 그 중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악귀를 쫓던 사람)로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걸치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또, 그 중 한사람은 창수(唱帥 : 驅儺할 때 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거머쥔다.

고각군(鼓角軍)은 20인을 1대로 삼는데, 깃대를 잡은 사람이 4인, 퉁소를 부는 사람이 4인, 북을 가진 사람이 12인이다. 이렇게 하여 악귀를 궁중에서 쫓아낸다고 한다. 이 의식에서 사용되는 가면, 붉은 옷, 방상시, 가무악 등은 모두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서 민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로부터 가면은 축귀의 기능이 강하였고, 붉은 옷도 붉은 색깔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방상시의 황금사목(黃金四目)은 비정상의 과대표현으로 잡귀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달아나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악공들의 연주에 맞추어 진자들은 춤을 추었는데 처용무도 추었다.

처용무는 5인5색의 옷을 입은 무동(舞童)이 처용의 탈을 쓰고 오방(五方)으로 벌려 서서 추는 춤으로 벽사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나례 때 희생(犧牲)으로는 닭 다섯 마리를 잡아 역기(疫氣)를 쫓았는데 정종이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닭 대신에 다른 물건으로 대용하도록 하여, 황토우(黃土牛) 네 마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대궐에서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벌이던 대나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시대에 따라 동원되는 인원과 규모·격식 등에 있어 차이는 있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고, 나중에는 그 유습만이 남게 되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정월 원일조(元日條)에 의하면, 대궐 안 궁전 근처에서 각각 총을 놓아 세 번 소리를 내고 지방관청에서는 우인(優人 : 화랑이)들이 허수아비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호령을 하고 무엇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몇 바퀴를 돌다가 나가는데 그것은 나례에서 끼쳐진 법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국세시기』 12월 제석조(除夕條)에 의하면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화전(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귀신을 쫓는 행사의 유풍이라고 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도 이러한 유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함경도 풍속에 ‘청단(靑壇)’이라 하여, 마치 원주(圓柱) 안에 기름심지를 박은 것 같은 빙등(氷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나희를 행한다고 하였고, 평안도에서도 빙등을 설치하며, 의주(義州)에서는 동네에서 지포(紙砲 : 딱총)를 놓는다고 하였다.

나례는 이밖에 왕의 행차나 칙사의 위로, 신임사또를 위한 축하연 때 수시로 놀이되기도 하였다. 이 때 나례에서 하던 연희와 함께 광대들의 창(唱)과 예능, 기생들의 춤이 행하여졌다. 나례가 궁중의식에서 벗어나 연희화함에 따라 우인·배우·창우(倡優)·광대·재인·현수재인(絃首才人)·수척(水尺)·승(僧)·백정(白丁)·희자(戱子)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회의 천대를 받던 계층의 사람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악공들의 반주가 있었고, 기녀의 춤이 첨가되었으므로 희학(戱謔)을 위주로 하여 나희 또는 잡희(雜戱)라 불렸다. 또한, 이를 더욱 즐겁고 화려하게 하기 위해서 여악(女樂)도 동원되었다.

나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나례청이 있었으며, 후에는 관상감에서 관장하였다. 나례에 참여하고 잡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에 소속되어 있다가 때로는 양반 대가의 수연(壽宴)이나 혼사에도 불려가서 연희하였다. 대궐에서 나례를 할 때에는 인정전(仁政殿)·사정전(思政殿)·명정전(明政殿) 뜰에서 거행하였는데, 탈에는 사람과 짐승의 여러 모습이 있었고 이것을 얼굴에 쓰고 표정을 내어 탈춤의 효과를 내려 하였다.

무대는 붕(棚)을 만드는 외에 산차화대(山車花隊)라는 큰 수레가 달린 차에 봉각을 짓고 장치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편, 잡상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만든 좌판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바퀴가 달린 차 위에 놓아 윤차(輪車)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나례는 세밑에 가정과 대궐에서 악귀를 쫓는 벽사에서 백희나 잡희로 연희됨에 따라 종교성은 희박해지고 점차 놀이로 변모하였다. 대궐에서 거행하던 나례의식은 현재 사라졌으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섣달그믐날에 대청소를 하고 밤중에 폭죽을 터뜨려 정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하려는 유풍이 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한국세시풍속연구』(임동권, 집문당, 1985)
『조선상식』(최남선, 국문사, 1953)
집필자
임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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