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

나운규
나운규
영화
인물
일제강점기 「아리랑」, 「풍운아」, 「벙어리 삼룡」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이칭
춘사(春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37년
본관
나주(羅州)
출생지
회령
관련 사건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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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아리랑」, 「풍운아」, 「벙어리 삼룡」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개설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춘사(春史). 회령 출신. 한의(韓醫) 나형권(羅亨權)의 6남매 중 셋째아들으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에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친 뒤 1923년 출감하였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다.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尹白南)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첫 출연, 연기력을 인정받아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沈淸傳)」에서 처음으로 주역(심봉사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았다. 이듬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농중조(籠中鳥)」에 출연하여 절찬을 받음으로써 일약 명배우가 되었다.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 만들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과 「풍운아」를 직접 쓰고 감독·주연을 맡아 영화계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되었다.

1927년에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하여 「옥녀(玉女)」·「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격조높은 문예영화 「벙어리 삼룡」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투쟁하는 늙은 나팔수를 그린 영화 「사랑을 찾아서」 때문에 일본경찰에게 붙잡힐 뻔하였다.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나 무질서한 사생활로 회원들이 떠나 다른 영화사를 창설함으로써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었다.

그 뒤 박정현의 원방각사(圓方角社)와 손잡고 「아리랑 후편」·「철인도(鐵人都)」를 만들었고,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도야마프로덕션(遠山 Production)의 「금강한(金剛恨)」에도 출연하였다. 이 때문에 나운규의 인기는 하루 아침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생활을 위하여 배구자(裵龜子) 일행의 악극단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영화계를 1년여 동안 시찰하였고, 1932년에 귀국하여 윤봉춘을 비롯한 옛 동지들을 모아 영화 「개화당이문 開化黨異聞」을 만들었으나, 검열로 많은 장면이 잘린 채 개봉되었기 때문에 흥행에서 큰 실패를 보았다.

같은 해 이규환(李奎煥)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시기는 제2기에 해당하는데, 이 때의 작품들은 「무화과」·「강 건너 마을」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명비판·사회비판 등 부정정신을 나타낸 것들이다.

그 밖에 「종로」·「칠번통(七番通)의 소사건」·「그림자」 등을 제작했으나 실패작이었다. 이 때는 그에게 가장 불우했던 시기로서, 극단 신무대(新舞臺)나 현성완(玄聖完)이 이끌던 극단 형제좌(兄弟座)를 위하여 연쇄극(連鎖劇)을 만들어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 우리나라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영화가 등장하자, 나운규는 「아리랑」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하였다. 그는 계속 문예작품의 영화화에 주력하였는데, 이때 이태준(李泰俊)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예술적 승화를 이루었으나, 오랫동안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으로써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가 제3기이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을 담고 있으며, 악덕·난륜(亂倫)에 대한 신랄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그대로 우리나라 영화 자체의 성장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배우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다. 그는 민족영화의 선각자이며,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나운규 그 예술과 생애』(김원호, 백미사, 1982)
『한국영화발달사』(유현목, 한진출판사, 1980)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1969)
『한국영화측면비사』(안종화, 춘추각, 1962)
「영상의 영웅 나운규」(이두현,『한국의 인간상』5-문학예술가편-, 신구문화사, 1965)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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