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주청년총동맹 ()

정치
단체
1946년에 결성되었던 우익청년운동단체.
목차
정의
1946년에 결성되었던 우익청년운동단체.
개설

김두한(金斗漢)·박용직(朴容直)이 중심이 되어 1946년 4월 9일 서울의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결성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45년 11월 초 신불출(申不出)이 주동이 되어 조선청년전위대(朝鮮靑年前衛隊)를 결성, 장명환(張明煥)이 두령이 되고 신불출이 참모장, 김두한이 전위대장이 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박용직은 이것이 신불출을 앞세운 좌익의 농간임을 알고 김두한에게 탈퇴하도록 권고하였고, 김두한은 그의 아버지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암살당하였다는 친구들의 이야기와 박용직, 이규갑 등의 권유로 전위대에서의 탈퇴는 물론, 이 단체의 파괴를 결심하고 박용직과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결성을 합의한 뒤 일방적으로 조선청년전위대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엄항섭(嚴恒燮)·정인보(鄭寅普) 등 주로 민족진영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치르고, 명예회장 이승만·김구, 고문 신익희 외 6명, 참의(參議) 설의식(薛義植) 외 26명, 회장 유진산(柳珍山), 부회장 김창형(金昌炯)·김근찬(金根燦), 총무부장 유우석(柳愚錫), 사업부장 겸 지방부장 김후옥(金厚玉), 재정부장 박정래(朴貞來), 감찰부장 김두한, 정보부장 장우극(張愚極), 선전부장 박용직, 조직부장 조권(趙權), 교도부장 유약한(劉約翰), 중앙위원 김건(金鍵) 외 12명으로 간부진용을 갖추었다.

서울에 강력한 남녀조직을 구축한 이들은 조선청년전위대와 충돌이 잦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시공관사건(市公館事件)’이었다. 이 사건은 1947년 4월 20일 좌익측의 신불출이 주동이 되어 서울 시공관에서 개최한 전국문화예술인경연대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김두한을 대장으로 하는 감찰대원과 김영태(金永泰)를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원들이 전위대측의 경비대와 충돌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좌익측의 전국문화예술인경연대회는 유회되고, 이 충돌에서 좌익측의 전위대원 3명이 타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김두한·김영태 등 14명이 미군정에 구속되어 군사재판을 받은 결과 김두한·김영태는 사형, 나머지는 무기 내지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정부수립 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령>을 위반한 죄목으로 해산될 상황에 처하였으므로 4월 25일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 해산은 말뿐이었고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활동하였다. →청년조선총동맹

참고문헌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錦文社, 1973)
집필자
윤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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