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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근대사단체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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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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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 남구 마권자(馬圈子)에서 열린 남만한족통일회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조직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개편되며 한인 교민의 자치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통군부는 1922년 6월 3일 중앙직원회의에서 문호를 대개방하고 다른 기관과 더불어 통일하되 일체 공결에 복종할 것을 천명하고, 다른 독립운동단체와 교섭하였다.
1922년 8월 23일 군정서(軍政署)·대한독립단(大寒獨立黨)·한교민단(韓僑民團, 이칭: 한교회)·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등 이른바 8단(團)9회(會) 대표 71명이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모여 대한통의부 결성 등 6개항을 결의하였다. 8월 30일 남만한족통일회장(南滿韓族統一會長) 김승만(金承萬) 명의로 결의 내용을 발표하였다.
총장에는 김동삼(金東三)이 뽑혔고, 부총장은 채상덕(蔡相悳)이 되었다. 그리고 비서과장 고할신[高轄信, 일명: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교통부장 오동진,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이 선출되었다. 지방 행정은 각 현에 총감(總監) 사무소를 설치해 총감 이하 임원을 두었다.
총감은 1,000호의 장(長)으로 지방 형편에 따라 1구(區)를 100호 내지 200호로 했으며, 4, 5구의 관할 구역으로 나누어 구장(區長)을 두었다. 한편, 군사 조직은 5개 중대와 2개 독립소대에 850명(전성기 3,250명)이 소속되었다.
중앙부는 관전현(寬甸縣) 안에 있었으며, 흥경(興京)·환인(桓仁)·통화(通化)·집안(集安)·유하(柳河) 등 12개 소에 총영(總營)을 배치,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고 주구배(走狗輩)을 숙청하는 데 힘을 모았다.
한편, 통합된 군사 조직으로 의용군이 편제된 것은 1922년 8월 말이었다. 통합 편제 전까지 통군부 소속 무장부대 및 통의부 소속 예정이었던 무장부대는 독자적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7일(음력), 김태연(金泰淵)이 대원을 인솔하고 영산주재소를 습격, 적 경찰 3명을 사살하였다.
이듬 해 12월에는 김우근(金宇根)이 대원을 인솔하고 중강진 정적병수비대와 교전, 적 11명에게 전상을 입히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경찰대와 충돌하여 중국 경찰 1명에게 전상을 입혔다.
1924년 7월, 일본군에 매수된 마적단의 습격을 받아, 무의미한 전투를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싸움에서 사령관 신팔균(申八均)과 대원 유경렬(劉景烈) 등이 전사했다. 한편, 김사헌(金史軒)·선우일(鮮于一) 등은 기관지를 편집, 발행하여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교육으로써 민중을 계몽하고자 힘썼다.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전덕원(全德元) 등이 이탈해 의군부(義軍府)를 만들고, 유응하(劉應夏)·여순근(呂淳根) 등은 대한군민부(大韓軍民部)를 만드는 등 분열 되었다가 참의부·정의부 등에 흡수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밑으로 들어갔다. 기관지로 『경종보(警鐘報)』를 발행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정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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