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금은 금속이나 플라스틱 등 표면의 미관, 부식 방지, 마모 방지 및 물리적 및 화학적 성능 향상을 위하여 금속을 모재 위에 입히는 장식기법으로 금입히기이다. 금속을 입히는 것만이 아니라 금속의 산화물 등을 금속 표면에 입히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전래로 불상에 도금하는 방식이 전해졌다. 백제는 청동 불상을 주조하고 수은에 금을 흡수시킨 아말감으로 금도금하는 기법이 뛰어났다. 구리 합금에 금을 도금한 것을 ‘금동’이라 한다. 현대에 이르러 도금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표면 처리 공장은 대형화가 되었다.
도금을 하는 방법으로는 ① 도금하고자 하는 금속을 용융시켜서 물건을 담그어 금속을 입히는 방법. ② 도금하고자 하는 금속의 화합물을 물에 용해시켜서 금속을 물 속에서 이온상태(+전기를 띤 상태)로 만들어서, 직류전기를 흘려 음극(-극)에 금속이 방전되게 하여 금속을 입히는 방법. ③ 용액 속에 있는 금속이온을 이온화 경향 또는 환원제(전자를 주는 화합물)를 사용하여 물체에 금속을 입히는 방법. ④ 진공 중에서 금속을 증발시켜서, 그대로 또는 이온상태로 만들어서 음극에서 방전하게 하여 도금을 하는 방법(반도체 제조 등에 응용) 등이 있다.
현재 도금의 영역에는 단순히 금속을 입히는 것만이 아니고, 금속의 산화물 등을 금속표면에 입히는 것도 도금 또는 금속표면처리라고 총칭하고 있다. 도금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중국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 금단(金丹)과 환단(還丹)을 만든 것에서 비롯된다. 금단은 금가루액으로 만들며 환단은 수은을 주로 하여 만들었는데, 이는 장수(長壽)의 비결로 쓰이는 선약(仙藥)이기도 하였지만, 그 뒤 불상이나 장식품의 도금에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後漢) 때는 금으로 도금된 불상이 주조되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불상에 아말감(amalgam)으로 금도금을 하는 것이 성행하였고, 특히 목불(木佛)에 옻이나 아교로 금박을 바르는 방법을 썼다. 금가루를 아교에 갠 것을 금니(金泥)라 하고 은가루를 갠 것을 은니(銀泥)라 하는데, 이것을 나무나 금속에 발랐으며 이 방법을 도금이라고 하였다. 원래, 도금이라는 말은 불교의 중생제도(衆生濟度)의 도(度)에서 나왔다. 도는 좋지 않은 것을 좋게 하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구리처럼 변색이 잘 되는 것을 금을 입혀서 변색되지 않는 쇠붙이로 만드는 것도 도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청동의 표면에 금을 입히는 것을 도(鍍)라 하게 되었으며, 일반 금속에 다른 금속을 입힌다고 하여 도금이라고 하게 되었다.
한편, 서양에서는 730년 아라비아의 자아빌이 왕수(王水) · 승홍(昇汞) · 질산은(窒酸銀)을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질산은으로 은도금을 하였다. 12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인공적으로 금을 만들어 보려는 연금술(鍊金術)이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다른 금속에다 금속으로 도금함으로써 금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14세기 독일에서 얇은 철판에 주석을 용해하여 입힌 도금이 개발되었다. 16세기 중엽 스위스의 파라세르사스가 금 · 은의 염류수용액(鹽類水溶液)에 구리와 납을 넣고 여기에 금봉(金棒)이나 은봉을 접촉시켜 금도금이나 은도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화학치환도금(化學置換鍍金)의 시초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에 토기의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숫돌 같은 것으로 연마하는 도단마연(塗丹磨硏)의 방법이 있었다고 하며, 낙랑고분의 출토물에서는 색깔 있는 칠(漆)을 한 무늬나 그림을 넣은 것과 금 · 은박을 입힌 것들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최초의 금속도금물이다. 그밖에 기원전 3, 4세기에 페르시아나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동경(銅鏡)과 동검(銅劍)에서도 표면 처리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그 뒤 불교의 전래에 따라 불상에 도금하는 방법이 전해졌다. 이때 백제에서는 청동불상을 주조하고 수은에 금을 흡수시킨 아말감으로 금도금하는 기법이 뛰어났다. 즉, 금을 판조각으로 만들어 4∼8배 무게의 수은 속에 넣고 녹인 뒤 청동불상의 표면을 볏짚으로 문질러 곱게 하고, 약한 산인 매초(梅醋)로 표면의 산화물을 제거한 다음 금을 녹인 아말감을 바르고 350℃ 정도의 온도로 가열하여 수은을 증발시킨다. 이와 같은 방법을 되풀이하여 완성시킨다. 다른 방법으로는 수은을 미리 바르고 그 위에 금박을 놓고 가열하여 금만 표면에 남게 하는 방법(gilding)도 있다.
이러한 도금기술은 삼국시대 이미 일본에 전해졌다. 749년에 완성된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도 백제 사람 고마로(公麻呂)가 황금 1만1436냥(480.3㎏), 수은 5만8600냥(2,461.2㎏)의 막대한 양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이때의 우리나라 도금기술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금은 ‘도금(塗金)’ 또는 ‘도련금(塗鍊金)’이라고 표현하였다.
구리 합금에 이와 같이 금을 도금한 것을 ‘금동(金銅)’이라 하며, ‘금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불상 등은 모두 금도금을 한 것을 말한다. 삼국시대에 만든 금동합(金銅盒), 금동제 안장, 금동고배(金銅高杯)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을 보면, 금으로 도금이 잘 된 부분은 아직도 부식되지 않고 그대로 금색찬란하게 원형이 남아 있고, 도금이 벗겨진 부분은 구멍이 뚫리는 등 부식이 심하다. 이러한 도금법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로 그대로 전수되어 왔으며, 별다른 발전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도금에 쓰는 수은은 주로 중국 등 외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며, 『조선왕조실록』에는 1492년(성종 23) 김중보(金仲寶)가 처음으로 주사(硃砂)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건물에는 금박을 바르는 것이 성행되었다. 1427년 중국 명나라 의종(宜宗) 때 의덕동기(宜德銅器)라고 하는 다색(茶色)과 청색으로 인공착색을 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연마한 동기에 물 1.8l, 황산동(黃酸銅) 7g, 녹청(綠靑:염기성탄산염) 11g을 끓인 액에 넣어서 처리하고, 예안(刈安:화본과의 다년생초)의 즙을 바른다고 하였고, 예안과 남(藍)을 함께 쓰면 녹색으로 된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그 당시의 기록을 약탈하고 기술자들을 거의 모두 일본으로 데려가서 도자기기술과 금속기술이 일본에 많이 이식되었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갑옷에 있는 투구 [사진 1]가 400년이 지난 현재도 거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어, 그의 14대 손 한익(漢翊)이 과학적 조사를 해본 결과 [사진 2] · [사진 3]과 같다. 이는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것들로서, [사진 2]는 투구 철편의 전단면(全斷面)이며, 철의 양편에 A도금층이 백색으로 보이고, 중간의 B층은 철소지(鐵素地)이다. [사진 3]은 한쪽 도금층을 확대(840배)한 것으로, 회색도금층(2)에 백색덩어리(1)가 여기저기 있다.
이들 (1)과 (2)의 부분을 X선으로 분석해 본 결과 회색의 도금층(2)는 전부 주석 100%로 되어 있으며, (1)부분의 백색덩어리는 납 90%, 알루미늄 7%, 주석 3%의 합금이었다. 이 도금층의 두께는 약 0.05㎜(50μm)이며, 독일에서 철판에 주석(용융)도금을 한 지 약 300년 뒤였으나, 그 당시 주석의 용융도금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1)부분의 백색덩어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주석가루에 내식성(耐蝕性)을 높이기 위하여 납가루를 섞고, 가열한 철판을 이 속에 넣어 붙이고 더 가열하여 주석층을 완전히 녹여서 도금층을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특수한 도금법은 다른 나라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으며, 특히 조선 건국 당시 은으로 만든 사리기(舍利器)에 금으로 도금된 것이 있는 것 외에는 도금의 기록이 특별히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도자기 제작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일본인에게 기록을 약탈당하여 밝혀지지 않았을 뿐 대단히 훌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문헌이 없어져서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적 발달사를 조선시대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오히려 일본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전기도금에 관한 자료는 보이지 않으며, 다만 과학사에 나타난 것은 ‘금속상감법(金屬象嵌法)’으로 철제품의 표면에 줄을 그어 자국을 내고 거기에 은이나 오동(烏銅) 등을 박은 다음에 녹여서 도안화한, 길상문(吉祥文) · 문자(文字) 등 입사문(入絲文)으로 된 것과 앞에 적은 주석도금뿐이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광복되고 얼마 동안 일본에서 행하던 낙후된 표면처리법이 그대로 이어졌다. 즉, 모든 도금은 금속제품의 표면을 연마하여 광택을 낸 뒤에 도금하면 광택이 없어지므로 다시 도금층을 연마하여 광택을 내고 탈지(脫脂) · 산세(酸洗) 등 전기처리를 한 다음에 그 위에 다른 도금을 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하였다. 그리고 니켈 도금은 현재보다 느리고 무광택의 도금이었다. 알루미늄의 표면처리에서는 교류에 의한 수산법만을 행하고 있었다. 이 방법은 황금색으로 염색할 때는 엽차(葉茶)를 끓여서 타닌산을 추출하여 염색하고, 과망간산칼륨액으로 산화시켜 황금색을 얻는 느리고 힘든 방법을 택하고 있었으며, 6 · 25 전쟁 때까지도 이것이 큰 기술로 비장되어 있었다.
6 · 25전쟁 때는 피난민의 식기가 매우 모자랐으므로, 염희택(廉熙澤)은 이 수산법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1956년 미국과 독일에서 황산을 전해액(電解液)으로 하는 직류양극산화법을 도입하여 1957년부터 간편한 황산법과 산화 피막(皮膜)에 여러 가지 색을 염료로 착색하는 방법을 도입하였으며, 황금색은 엽차 대신 내광성(耐光性)이 좋은 수산제2철암몽의 무기염(無機鹽)으로 착색하는 방법을 우리나라에 정착시켰다. 이것으로 알루미늄 공업은 크게 발전하였다. 또, 1956년 미국에서 니켈 · 구리 · 아연 등의 전기도금용 광택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였고, 독일로부터 알루미늄의 전해연마법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이 시대에 일본에서도 유럽지역에서 표면처리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일본과 평형적인 표면처리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1960년경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니켈광택제 등을 수입하여 도금계에 사용하게 함으로써 구리 · 니켈 · 크롬도금에서는 버프연마(buffing) 없이 광택이 좋은 도금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니켈도금 속도도 빨라졌다. 1965년 일본을 통하여 미국제품인 황산동 광택제를 도입하여 쓰게 되면서부터 광택뿐만 아니라 평활성(平滑性)이 더욱 좋은 도금을 할 수 있게 되어, 버프연마의 흠이나 줄도 메워 주며 무광택 표면도 광택 표면으로 만들어주는 획기적인 도금으로 발전되었다.
1967년 도금 서적 『금속표면처리(金屬表面處理)』가 처음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책이 10회 연판(連版)을 거듭하면서 도금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었고, 이어서 『도금기술』을 1972년경 김회정(金會楨)이 출판하였다. 그리고 파이프나 철판의 용융아연철판 대신 일부가 전기아연도금철판으로 바뀌었다.
1948년경부터 이상덕(李相德)이 일반 전기도금을, 광복 직후부터 차경석(車京錫)이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아 경질크롬도금을, 1955년경부터 이윤식(李允植) · 이방우(李芳雨)는 자전거 부품의 도금을, 1964년경부터 박종근(朴鍾根)은 염희택과 함께 알루미늄 새시 생산에 따른 양극산화피막처리를, 1960년경부터 박봉화(朴鳳華)는 진공증착도금(眞空蒸着鍍金)을, 이성희가 1960년경부터 레코드판의 전주(電鑄)를, 1965년경 이준휘(李準徽)는 반자동 도금기를 일본에서 도입하였다. 한애삼(韓愛三)은 1981년부터 우리나라 독자적으로 자동 도금기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전자부품인 전기회로판(PCB) 도금은 김정식(金貞植)이 1970년 초반부터 시작하여 대성하였다.
1970년 후반부터 수출호조의 힘을 입게 되어, 공산품의 생산이 증대됨에 따라 공해가 많이 유발되는 것을 대도시 이외의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일환으로, 경기도 안산 및 인천의 남동, 대구의 성산단지 및 현풍단지, 부산의 사상 및 장림단지 등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도금 및 표면처리공장이 이전하면서 설비가 대형화 및 자동화로 되고 도금공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프린트회로판 제조는 전자기기와 통신기기의 발전 및 소형화로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TV나 컴퓨터가 아날로그법에서 디지털법으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화면과 새로운 전달방법으로 되면서, 여기에 반도체 칩의 고밀도화로 더욱 많은 기판과 소형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로써 진공도금법이 주도하는 반도체에서, 특히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를 주도하게 되어 이에 수반되는 전자부품의 눈부신 발전과 생산은 프린트기판에서도 전 세계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자동차의 생산이 연간 몇 백만대 수준에 이르게 됨으로써 도금량은 기하학적으로 증대되어 많은 중소기업이 도금설비를 확장, 신설 등으로 도금공장의 수는 대형화하면서도 몇 천개의 업체로 늘어났다.
1997∼1999년에 이르는 한국의 외환위기에 많은 도금업체가 도산하였으나, 수출에 관여하는 업체 등은 오히려 환율의 혜택으로 더욱 발전되어, 1999년 말경에는 도금업체의 증가, 확장 등으로 공단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한 도금공장에서 필수적으로 배출되는 공해물질도 선진국의 방법을 도입하여, 폐수 중의 유가성분은 회수, 물의 재사용 등으로 생산원가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무폐수의 방법을 채택하기 시작하여, 환경을 해치는 원흉으로 생각되든 도금공업도 멀지 않아 환경친화적인 공업으로 되기 시작할 것이다.